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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1. 2024

아, 나이아가라!

사진-픽사베이

찰나의 환상인가, 한바탕의 꿈이었나.

그곳을 간다. 감동 없이 건조해져 가는 영혼에 물기를 적셔주기 위해서.

그보다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세계를 하나 더 추가하기 위해서.

어떤 고통일지라도 상쇄시킬 수 있고 나아가 상처 없이 아픔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행복한 기억의 힘을 나는 믿는다.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모진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가슴에 향기로운 장미꽃을 피워낼 수 있음이니.


청량한 바람결 가르며 달리는 차. 마치 경부고속도로 양산 어디쯤만 같은,

아니면 대관령 어디쯤 지나는 듯싶게 낯설지 않은 차창 밖 풍광.

거의 한국과 다를 바 없는 산이요 들이다. 저만치 산자락에 몽글몽글 브로콜리 송이 같은 나무들이 소복하고

그 새새로 파스텔화처럼 부드러이 피어난 자귀나무 꽃.

길가 야생화도 제철 맞아 흰꽃 남보라 자주보라 한창 무리 져 나붓거린다.

 
그렇게 숲 사잇길을 지난 다음 드문드문 자리한 초원의 집들을 스치니 비로소 미국답다는 느낌이 든다.

초지의 농장에는 저 혼자 빛바래가는 건초더미며 무성한 옥수수밭, 해바라기 밭도 간혹 보인다.

그보다 더 미국이라는 실감을 안겨주는 건 줄지어 이동하는 차량 행렬에서다.

날렵한 보트를 트럭에 싣거나 이끌고 휴가 즐기러 오대호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 거의가 백인이다.

복작대는 도시에서는 그리도 흔한 유색인이건만 여기선 거의 눈에 띄질 않는다.

어쩌다 한국인 가족들이나 인도 사람들을 만나는 게 고작이다.

   
문득 選民이 된 기분이 든다. 팍팍한 삶에 대한 위로인가, 보너스처럼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

이리 큰 축복의 선물을 마련해 둔 하늘에 감사드린다.

극진한 그 사랑, 정녕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바쁜 일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했는데 지금사 돌이켜 생각하니 그리움 품을 수 있는 작별 있게 하심도 감사하고

특별한 만남의 인연 닿게 하심도 얼마나 감사 충만인지.

 

버펄로를 지나려니 가슴은 절로 끓어올랐다.

열에 들떠 속이 다 울렁거리고 동계는 걷잡을 수없이 마냥 거세졌다.

그가 마주했던 하늘, 그가 숨 쉰 공기를 직접 접한다는 감회. 마음이 벅찼다.

그 지명은 지도상의 단순한 한 ‘곳’이 아니었다.

야생 들소의 거친 상징성 이전에 내게 그 이름은 꽃으로 다가온 눈부신 의미 같은 거였다.

시작은 평범했으나 어느 순간 나는 용암을 삼키고 말았으니.

 
이리 호에서 온타리오 호로의 긴 여정, 그렇게 출발은 바다이듯 창창한 호수로부터였다.

고요히 빛나던 평화의 자리를 뒤로하고 강물은 돌아올 수 없는 여행길에 나섰다.

자의였을까. 섭리였을까.

그렇다,

운명이었으리라. 격랑 져 치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
           


강폭은 넓고 수량은 풍부했다. 물 흐름은 급했으며 물살은 거셌다.

수문 동시에 열어 한꺼번에 방류시키는 댐의 물줄기만큼이나 강물의 기세는 강하고 강물 소리는 힘찼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백마 떼의 기상이랄까.

자유로이 내닫는 호쾌한 질주는 거침없이 용솟음치는 젊은 열정 같았다.

감당키 벅차고 제어 불가능인 가히 광적인 몸짓.

멀리서 그 호방함을 바라만 봐도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이아가라 강줄기의 허리쯤, 빙하기 이후 절벽 아래가 침식되며 거대한 폭포의 위용을 만들어냈다.

이 장관 또한 신이 대륙에 선사해 준 위대한 창조물 중의 하나.

어떤 헌정사도 무색해 그냥 침묵하게 만들던 그랜드 캐년에서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폭포 인근에 다다르니 낙차에 따른 굉음과 함께 주변에 자욱이 운무가 피어오른다.

노천탕 위에 떠도는 수증기와도 같고 분출되는 화산재 같기도 하다.

뽀얗게 서린 물안개 사이에 裸身 은근히 숨긴 폭포. 장엄하고도 현란한 비경,

그건 차라리 청백색 명멸하는 불꽃놀이였다.

               
해당화 향기의 영접 속에 한여름 폭포 앞에 마주 섰다.

남극에 펼쳐진 빙산이 이렇듯 장엄할까,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내리쏟는 물줄기도, 지축 울리는 물소리도 엄청 웅장하고 박력이 넘친다.

알프스를 넘어 진군하는 나폴레옹,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기세인들 여기 견주랴.

로키산맥 만년설 천둥 치듯 쏟아지는 눈사태나 이러할까.

도무지 조금치도 주저함 없는 돌진이다. 미련 없는 투신이다. 격한 탐닉의 몸짓이자 미친듯한 몰입이다.

아니 기꺼이 바치는 순교다. 하여 환희로이 맞는 종말이다.

그리고 다시금 예비된 부활. 누군들 생애에 단 한 번 이리도 황홀한 엑시터시를 꿈꾸지 않으랴.

                                                
고트섬에 건너가 강물을 가까이에서 느껴본다.

그 섬에서 갈라지는 미국 쪽 폭포, 캐나다 쪽 폭포. 사이에는 수줍은 신부의 면사포도 걸쳐 놓았다.

앞에서 보던 폭포와는 또 다른 폭포의 옆모습,

외경스럽다 못해 아예 압도 당하고도 남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다. 위풍당당 그 자체인 폭포.

어느 미국인이 남미의 이과수 폭포를 보고는 아, 초라한 나이아가라여! 탄식했다지만

이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끊임없이 소리치며 달려와 수직으로 낙하하는 푸르른 강물. 빠른 속도감에 어지럼증이 인다.

언뜻 은박지처럼 반짝대다가 금세 내리쏟아붓는 옥빛 구슬 되어 산산이 흩어져 포말로 스러지는 장렬한 최후.

그래선지 후광처럼 내다 거는 무지개조차 비장감이 감돈다.

                                

나이아가라와 하나 되려면 배를 타고 폭포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던가.

유람선 ‘안개 아가씨’에 실려 요란한 폭포소리 한가운데로 진입한다.

지구의 매혹적인 볼우물, 그보다는 아른대는 물보라에 가리어진 순결한 여인의 내밀한 곳으로 깊숙이.

쇳물 이글거리는 용광로 속이다. 예서제서 이는 환호, 아예 열광의 도가니다.

저절로 탄성이 터진다. 종당엔 신음을 흘린다. 마구 튀는 물방울, 격한 소용돌이.

몰아치는 폭풍우 속 장대비에 난타 당하니 감전되듯 쩌릿거리며 야릇하게도 전율이 인다.

격정에 휘말리며 아지 못할 최면의 힘에 함몰되는 자신.

목청껏 함성을 지르고 싶다. 미친 척 탭 댄스를 추고도 싶다. 이상한 기운에 휘말려 고조되는 열기.

뜨겁게 몰아가는 격랑이 슬그머니 두렵다. 눈을 떠야 하나 전신에 흩뿌려대는 물 세례로 눈은 뜰 수조차 없다.


흠뻑 덮어쓴 물, 그래 맘껏 쏟아부어라. 세포마다 속속들이 물줄기여 꽂혀라. 온통 젖어주마.

나를 송두리째로 너에게 내어주리니, 아낌없이 바치리니 나를 접수해 주렴.

영과 육의 합일, 나 너와 하나 된다면 죽음인들 두려워하랴.

가슴 벅찬 이 순간을 영원 속에 각인시킨 채 그냥 눈 감고 싶거늘.

그대 속에 용해되어 그대와 한 몸 된 지금,

세상은 이대로 정지되어도 좋으련.                                                         

심장이 요란스레 뛴다. 맥박이 빨라진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접신의 순간이 이러하리라.

니르바나, 절정감에 온 삭신의 힘이 빠진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대로 뱃전에 주저앉을 듯 나른해진다.

허공의 구름인가, 폭포는 손에 잡힐듯하다가 사라져버리고 오직 장대한 물 휘장만 앞을 가로막을 뿐이다.
                                                                                                            

정신 얼얼하도록 한나절을 폭포소리에 잠겼다가 온 길 되짚어 다시 달리는 차.

아쉬움 그대로 남겨진 버펄로를 뒤로하고 어둠 짙은 뉴욕 주를 지나 펜실바니아 끝없는 평원을 가로질러

비몽사몽간에 뉴저지로 돌아온 새벽. 꿈길에도 폭포는 여전히 대단했다.

아, 나이아가라!                                                                           


-2001-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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