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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2. 2024

퇴계 종가에서 온 설중매


벌써 사반세기 전의 일, 아직도 개인 박물관이 존속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눈 깊은 삼동(三冬), 설중매를 만난 적이 있다.

온양민속박물관 로비에서다.

여린 갈색 매초롬한 줄기마다 흰 보푸라기 일 듯 총총 매달린 작은 꽃봉오리들.

더러 분재 전시장에서 고격(古格) 갖춘 매화 등걸에 다문다문 핀 몇 송이 백매를 본 적은 있지만 이와 같이 인심 좋은 매화의 환대는 처음이다.

그렇다고 헤프다는 게 아니다.

너그러운 시혜(施惠)라 여겨진다.


누리 온통 백설에 싸여 눈바람 시린 섣달에야 비로소 단아한 미소 머금는 설중매다.

고매(古梅) 아니라도 풍기는 분위기만은 범상치 않다.

박물관 보물 1호라며 설명을 이어나가는 관장님 음성에 윤기가 보태진다.

퇴계 선생의 15대 후손 되는 종손 댁에서 분주(分株) 해 온 지 서른 해째라는 백매다.

출신지부터가 예사롭지를 않다.

위대한 사상의 탄생처에서 뿌리내린 그 또한 사군자의 하나, 반가(班家)의 신분이다.

과연 힘이 실릴 만하다.


다시금 박물관을 새삼스레 둘러본다.

수년 전 찾은 적이 있지만 시간에 쫓겨 겉만 둘러보다시피 하여 인상에 남는 게 별로 없던 곳이다.

구닥다리로 치부해 홀대한 민속품만을 모아두었으니 뭐 대단하랴 싶은 선입견도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천만의 말씀, 민속은 겨레의 전통문화이자 민족의 기층문화 그 자체이다.

소중히 아껴야 할 우리의 뿌리인 셈이다.

조상이 남긴 얼과 혼의 자취를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보존 계승하고자 만들어진 민속박물관이니 그 설립 취지부터가 가상하다.


이 박물관은 계몽문화재단의 소유이다.

어린이 도서를 펴내는 출판사에서 시작,
여러 방면의 문화 사업을 펼쳐온 한 기업인이 이룬 괄목할만한 성취다.

수준 높은 문화와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양반골 안동이 그분의 고향이라 한다.

그럼에도 어떤 연고로 온양에 민속 박물관을 지었을까.

대답이 놀라웠다.

당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열기를 더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무궁히 뻗어나갈 중국을 겨냥한 중서부 지방의 발전상을 예견했다.

교역의 중심 거점 지역으로는 아산항을 꼽았다.

그분은 이미 삼십 년 전에 서해안 시대의 개막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결론이다.

과연 기업가 다운 탁월한 혜안과 높은 식견 아니랴.

당시야 누가 서해안 고속도로는 물론 서해대교 그 웅자를 꿈이나 꿨으랴.



박물관 첫 전시실에는 출산에서 제례의식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일생을 보여주는 의 식 주에 걸친 생활상이 일목요연하다.

두 번째 전시실로 올라가면 농경생활을 한 조상들의 소박한 체취가 물씬 배어난다.

수렵이나 어로작업에 쓰이던 손때 묻은 도구들도 알뜰히 갖춰져 있다.

셋째 전시실엔 돋보이는 민속공예품과 장승 솟대 등 민간신앙에 관한 자료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 곁, 뛰어난 과학성이 입증되는 목판인쇄며 천문 지리 관련 품목들 앞에선 절로 우리의 자긍심이 높여진다.

민화는 또 어떠한가.

미적 안목의 우수성은 물론 은근스러운 풍자와 해학에 이르면 마음의 주름살도 펴지고 만다.

오천 년에 걸쳐 면면히 뿌리내려온 우리의 전통문화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거의 소실 위기에 놓여있었는데,

 그나마 이처럼 용케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박물관 관계자의 숨은 노고 덕이리라.


전체를 찬찬히 둘러보고 내려오면 다시 만나게 되는 설중매.

박물관 소장 유물은 2만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보급 가치를 지닌 소장품도 다수라고 들었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첫째가는 보물이 설중매라 이르는 관장님.

퇴계 선생 댁으로부터 나눠 받은 매화이니 그럴 만도 하다.

퇴계 어른이 어떤 분이신가.

선비정신의 표상인 그분이야말로 동양 정신사에 우뚝 선 대 유학자이시다.

검소 질박한 인품으로 일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바친 분 아닌가.

제자를 가르치고자 향리에 세운 서당이 도산서원의 모태다.

또한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주자학의 대가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학설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理는 이성, 곧 성리이며 氣는 감성으로 칠정을 이른다.

이성을 키우기 위해 감성을 억제하되 너무 理를 숭상하여 氣를 멀리하지 않고 理로서 氣를 다스려 모든 사물을 조화롭게 운영해 나가야 한다는 조화의 원리를 가르치신 어른이시다.


올해(2000년) 그분 탄신 오백 주년을 맞아 안동에서는 숭모 행사를 준비 중이라 한다.

선비고을이란 자부심을 안동인들에게 심어준 발원지이기도 한 도산서원에서다.

팔도 인재의 절반이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수가 안동에서 나왔다는 말이 과장은 아닐 시 분명하다.

 문향(文鄕)이자 예향(藝鄕) 답게 사계(斯界)를 대표하는 걸출한 학자와 문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곳.

그 땅이 그 인물을 키운다 하였던가.

흠앙하는 민족의 큰 스승이신 퇴계 선생 댁에서 왔다는 설중매,

그 뿌리의 힘을 거듭 느낀다. 역시 보물 1호란 칭송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인 설중매 덕에 모처럼 영혼까지 호사를 한 소한(小寒) 날.

 밖은 온데 은세계라 눈이 부셨다.

세도나의 3월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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