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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1. 2024

스페셜 이벤트가 기다리는 성읍마을의 신춘

돗통시와 초가

요코하마를 출발한 크루즈가 이날 아침 강정항에 입항, 관광객 천오백 명이 도착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 까닭이겠다.

공교롭게도 성안 마을로 접어든 순간, 외국인 관광객들이 무리 지어 들어왔다.

대부분이 서구인들이고 일본인도 약간 섞여 있었다.

타이밍이 딱 들어맞아 때마침 성곽을 둘러보려던 참이었다.

종전까지 고즈넉하던 성읍마을은 갑자기 웅성대는 활기로 가득 찼다.

팀을 인솔하던 가이드가 앞에 나서서 읍성에 관한 설명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곁다리로 제주 성읍마을 역사해설 몇 토막을 대충 들어볼 수 있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성루로 올라가서 전망 즐기며 성벽길 따라 걷기도 했는데 올해는 전면 폐쇄.

여러 사람이 오르내리는 동안 위태로운 낙상 사고나 성벽 붕괴 위험이 뒤따라 선제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성벽 위를 걷는 것도 색진 추억, 노을빛 어린 원경과 성안 마을은 무척 고즈넉했는데.

해마다 봄이면 성벽 둘레에 노란 유채꽃, 가을엔 하얀 메밀꽃 하늘대는 풍경도 볼만하다.

정의 읍성을 둘러싼 이 성은 둘레 2,986척이나 된다.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이 13척 규모로 아주 두터운 석성을 쌓았다.

성에는 동서남으로 세 개의 문을 마련해 두었고 성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세종 5년, 축성을 시작한 지 5일 만에 완공을 보았다는데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역에 동원되었을까.


성문을 나서서 바로 앞에서 기다리는 고평오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69호)으로 들어갔다.

고택은 이외에도 여러 집이 남아있다.

객줏집(국가민속문화재 제68호), 고창환 댁(국가민속문화재 제70호), 한봉일 댁(국가민속문화재 제71호) 등.

18세기에 지은 고평오 가옥은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모커리(헛간채)가 ㅁ자 형태로 배치됐다.

이 집은 한동안 정의현 관원들 숙식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물팡(물허벅을 올려놓던 자리), 하영팟(텃밭)까지 찬찬히 훑다 보니 크루즈 관광객 동선과 다시 겹치게 됐다.

가이드는 열심히 고택 구조를 영어로 설명했지만 정작 그들이 가장 흥미진진하게 여긴 장소는 통시였다.

하긴, 그럴싸하게 만들어 앉혀놓은 꼬마 모형물이 작대기를 휘젓는 모양새가 어찌나 코믹하던지.

외국인 전수가 OMG을 외치며 뒷간 사진 찍기 바쁘더군.

한국 그중에서도 작은 섬 제주의 전통가옥 구조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거리야 되겠나.

아마도 돼지가 꿀꿀대는 이상야릇한 화장실이야말로 두고두고 빙긋 웃으며 기억하게 될 터다.

고택을 뒤로하고 짧은 올레길 돌아 나오니 훤한 대로가 나왔다.

이 길은 <근민헌>이 기다리는 정의현의 중앙로, 즉 관청가이자 최고 중심가인 셈이다.

신작로 양켠으로 유채꽃 흐드러진 저만치 일단의 관광객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좀 전에 본 팀과는 달리 이번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가이드였다.

근민헌 주변에서 오래 머물며 활기찬 음성으로 무언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현감이 정무를 보던 동헌이라며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건물 위에 팔작지붕을 얹었다는 얘기이리라.

그러나 창호문을 단 조촐한 이 근민헌이야말로 보는 이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따습게 하던지.

대개 동헌이라며 복원시킨 옛 청사들마다 위압적으로 군림하려 들 작정인지 거창하고 위풍당당 거만하다.

그에 반해 근민헌 뜻 그대로 백성 가까이 있는 집 다이 소박하고도 겸손한 모양새라 느낌 숙연해지기까지.

궁궐도 그렇지만 지방 관아만 봐도 백성들 주눅 들어 절로 쫄아들도록 규모 대단들 한데 의외였다.

동헌 마루 쩌렁쩌렁하게 불호령 내렸다는 춘향전에 나오는 남원 청사만 해도 엄청나지 않던가.

근민헌 맞은편에 있는 마방 터를 보니, 현감 이하 관원들이 말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정무를 보살폈겠다.

중심가 큰길 좌우로 난 골목길에 들어서면 정의현 객사 건물과 정의 향교가 모습 드러냈다.

객사의 기능은 지방관이 임금에게 초하루와 보름마다 배례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다.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무는 숙소로서의 역할을 하는 이를테면 영빈관 격이다.

또한 여기서 이 고을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나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향교는 다 알다시피 지방 교육기관이다.

동시에 산천이나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제사 올리는 석전제를 거행하는 장소다.

특이하게도 여긴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패인 전패가 보관돼 있다고 한다.

전패 때문은 아니겠지만 향교는 석전제 지낼 때나 열리는지 올 적마다 굳게 문이 잠겨있더군.

주춧돌 위에 겨우 올라서서 외삼문인 대성문을 비롯 대성전 사진 어렵사리 담았다.

명륜당이며 동재 서재는 고작 추녀선만 보일 따름이었지만.


인근에서 뭐니 뭐니 해도 걸출한 물상은 노거수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아닐까 싶다.

오랫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며 줄기 상처 입고 몸체 낡아 기울어졌지만 풍모야 비범하지 않던가.

천년이란 세월을 살아오면서 성읍 지킨 마을수호목인 느티나무.  

6백 년 생 팽나무는 나란히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느티나무는 제주어로 ‘굴무기낭’이라 불리는데 예전부터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았다.

'폭낭'이라 불리는 팽나무는 방풍림으로 마을마다 거지반 심었는데 수형이 참 멋졌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마을의 기운이 약한 곳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거목들이다.


원래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북쪽 지역은 제주목이었다.

남쪽은 정의현과 대정현으로 행정구역을 둘로 나눠서 삼분하여 다스렸다.

1410년에서 1914까지 이처럼 성읍마을은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현감이 마을을 관장해 왔다.

이를테면 행정 중심지였던 유서 깊은 고을인 셈이다.

숙종 28년인 1702년, 보다 정확한 사료가 되는 그림이 남아있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따르면 그 당시 정의현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정의현 내 민가 호수는 1,436호 · 전답 140 결 · 성 수비군 664명 · 말 1,178 필 ·흑우 228 수로 기록돼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주민과 재산을 보유했을 만큼 번성했던 읍성이었다.

따라서 관청, 향교, 성터, 전통 민가 등 다수의 유형 문화유산이 포진하고 있다.

고유의 민요, 민속놀이, 향토음식 등의 무형 문화유산 역시 비교적 잘 전수되고 있는 편이다.

현재 실제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성읍마을의 초가집들.

제주 민가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으며 옛 방식 그대로인 독특한 통시도 남아있다.

해서, 제주 초기 생활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제주의 속살이자 생생한 날 것 그대로인 성읍마을이 최적지.

그래서인지 매년 300만여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전통 민속의 보고인 이곳은 사계절 어느 때나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해 하루 알차게 보낼 수 있다.


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휘적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초가집 옹기종기 모인 성 밖 마을 한가운데.

여기선 일단의 한국인 관광객을 만났다.

떠들썩 왁자하게 주고받는 말투로 미루어 어느 지방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금방 파악이 되더군.

우스갯소리가 아닌 음담패설 수준의 질탕한 농지거리 나누며, 오늘 초가지붕에서 나온 굼벵이나 고아먹자나.

그럼에도 이웃한 토종 동백 송이 째 툭툭 지는 돌담 너머로 혹은 유채꽃밭 건너, 둥글게 엎딘 초가 정겨웠다.

맞바로 버스 다니는 차도가 이어졌길래 마음 푹 놓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렸다.

정낭과 정주석(대문) 돗통(돼지막) 촘항(빗물을 거두어 모으는 항아리) 물허벅(물동이) 구덕(대바구니) 같은 걸 쓰다듬어 보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일상이 스며들어있는, 그러면서 척박한 환경을 거스름 없이 살아낸 강인한 표징 같은 것들이다.


오메기 술을 파는 집 앞을 지나치며 성읍마을 무형문화재 13호에 대한 설명문을 읽어 내렸다.

탁주인 오메기 술은 제주의 선대들이 차조로 빚어 즐겨 마셨던 전통토속주, 그 외 고소리 술도 유명하다.

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고소리술은, 차조로 빚은 토속주를 증류해서 뽑는다고.  

소주(燒酒) 내리는 소줏고리를 제주어로 '고소리'라고 하는데, 맑은술로 알코올 도수가 높다 한다.

고소리술은 숙성할수록 청신한 향취와 함께 맛이 일품, 목넘김이 부드럽고 그윽하게 취기 도는 명품주란다.

또 다른 무형문화재로는 1989년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95호로 선정된 제주민요다.

성읍에서 불리던 오돌또기, 산천초목, 봉지가 등의 성읍 창민요 외에 여성노동요인 ‘맷돌노래’도 있다.

더구나, 2008년에 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9호 성읍리초가장이 실제로 작업 중인 '모공'을 볼 수도 있었다.  

성읍 향교마을 고샅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야말로 심봤다!

이른 봄부터 성읍마을 초가지붕마다 봄맞이 단장을 한다고 듣긴 했다.

가는 날이 바로 장날, 제주전통문화 '모공' 시연장 앞에 딱 닿았으니 웬 횡재인가.

마침 성읍 민속마을 초가지붕 새 잇기 초벌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말이 초벌 일이지 이때 낡은 옷 갈아입듯 해묵은 지붕을 걷어내고 새 띠로 지붕을 얹는다.

띠를 얹은 초벌지붕의 집줄은 엉성하게 대충 묶였다.

바람 거센 제주라 재벌 일을 하면서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집 줄 아주 단단히 고정시킨다

집줄로 똑 고르게 묶은 다음 단발머리처럼 반듯하게 이발시키는 모든 작업이 진행된다.

일주에서 열흘 간격을 두고 새 띠가 안정되이 차분하게 가라앉길 기다린다.

그다음 줄을 다시금 바짝 조여 튼튼하게 묶어준 뒤 집 줄 역시 같은 길이로 고르게 잘라 마무리를 한다고.

주거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후조건에 따라 자연에 적응하면서 틀을 잡아 온 역사적 산물이다.

화산섬인 제주도다.

어디서나 얻기 쉽고 가공하기 비교적 용이한 현무암과 한라산 초원에서 자라는 띠를 사용한 성읍마을 초가집.

전통방식에 따른 초가로 비교적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고택들.

그래서 전통문화의 전승 차원에서도 잘 보존돼야 하리라.

관광제주로의 대도약을 위해 다각도로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도 적극 주력해야 한다.

정의현감 행차 재현이나 전통민속공연 및 민요공연 같은 일회성 이벤트도 물론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전시용이나 보여주기 식이 아닌, 현재진행형 삶이 함께 하기에 성읍마을 초가가 귀중한 이유다.

우리는 모형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진짜에서 가슴으로 와닿는 진솔한 감동을 느끼게 되니까.

'초가장 기능' 전수자가 적은 지금은 지붕 잇는 기술을 가진 몇 사람이 동남아 인부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제주 초가집 이엉에 쓰이는 새는 시월경에 베어 잘 건조한 다음 고르게 다듬어 놓았다.

마을 공동작업으로 집줄을 꼬아서 야적해 두었다가 쓴다고 했다.

이엉 재인 띠(새)도 전에는 흔하디 흔했으나 지금은 계약재배로 시비까지 하며 정성껏 기른다고.

논농사 짓는 곳이 거의 없는 제주라 볏집 대신 새라고 칭히는 억새 비슷한 건초로 지붕을 덮는 제주다.

제주 전통 초가의 지붕 잇기는 무형문화재 제19호로 관리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변해가는 세태라 언제까지 명맥을 이어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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