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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by 무량화

애들은 내게 돈 좀 팍팍 쓰라고 성화 부린다.

쓸 거 쓸만치 쓰고 산다 해도 내 소비 수준을 마땅찮이 여기며 걸핏하면 "쓰는 만치만 내 돈인 거 모르세요?" 란 퉁박을 준다.

허나 불필요한 과소비를 안 한다 뿐이지 쓸 일이 있으면 흔쾌히 지갑을 연다.

꼴 사나울 정도로 씀씀이가 인색하거나 돈에 집착하는 수전노는 절대 아니다.

다만 쓸데없는 지출은 안 하는 편으로, 아마 나이 지긋한 세대들의 공통된 생활자세일 터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대로, 소비습관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지 않아서인지 팍팍 쓰는 재주는 분명 없다.

무소유의 철학에 심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재에도 밝지 못해 남들처럼 아파트 갈아타기나 주식 같은 걸 할 줄도 몰랐다.

아무튼 원래부터 목돈 뻥튀기하는 소질이 없었던 소심함에 걸맞게 백화점 쇼핑을 하고 나면 눈도 아프고 어지럽다.

친구 따라 대형몰이나 고급 쇼핑가를 돌아다니다 오면 그럴 수 없이 피곤하다.

남들은 돈 쓰는 맛만큼 신나고 즐거운 게 없다는데 그런 기분이 들지도 않는다.

아직까지 인터넷 쇼핑이란 걸 내손으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하면 천상 미개인이라 웃겠지만 사실이다.

딸내미가 알아서 대신해주다 보니 아마존에 물건을 주문해 본 적도 없다.

월 생활비도 적게 드는 축에 속한다. 애들은 그게 또 짜증 난다.

발발 떨며 쩨쩨하게 아끼려 해서가 아니라 식생활비부터 적게 드는 토종식성인 걸 어쩌랴.

외식을 즐기지 않는 집밥 체질인 데다 식탁은 그린필드 일색이라 식비 지출도 적다. (엥겔지수 당연 낮다^^)

그뿐 아니라 옷이나 화장품 등을 자주 구매하는 우수 소비자 축에는 당근 못 낀다. 물론 애들이 사 오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스스로를 위한 음악회 티켓 같은 뜻밖의 사치스런 선물은 자주 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아무튼 순전히 자신의 '외적 치레'를 위해 돈을 쓰려면 바보 같아 보이겠으나 이상하게도 아깝다.

미장원 출입은 일 년에 한 번, 화장에 유별나게 공을 들이는 성정도 아니니 로션 같은 기초화장품만 있으면 충분한 사람이다.

그래서 주름살천국 얼굴인지는 모르지만 기미나 저승꽃 같은 잡티는 아직 모르고 산다.

가끔 오는 언니는 볼 적마다 촌스런 아우가 안쓰럽다.

해서 미국행 가방엔 돌김, 들깻가루, 오이지, 마늘쫑과 함께 한국산 고급 화장품을 빠뜨리지 않는다.


세안 후 바르려고 에센스 펌핑을 하다가 화장품 통을 타일바닥인 세면실 발매트에 떨어뜨리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하필이면 지난해 언니가 한국에서 사가지고 온 선물로, 고가품에 속하는 A라는 화장품 브랜드 제품이었다.

여러 차례 무리하게 펌프질을 한 까닭은 에센스가 아무리 눌러도 나오지 않아서였다.

불투명 용기라 잔여량은 가늠되지 않았으나 벌써 화장품이 바닥났을 리 만무였다.

작은 병 치고는 가격 만만찮은 에센스던데 설마 하니... 하면서 펌프를 연거푸 눌러댔으나 에센스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얼굴 면적이 넓지도 않건만 그새 다 썼단말야? 어이없어하며 거칠게 펌핑을 하다가 미끄러져 떨어뜨리며 깨친 것.

박살 난 유리조각을 쓸어 담으며 자세히 보니 화장품 병 밑바닥이 장난 아니게 두텁다.

겉모양과 달리 내용물이 담기는 공간은 비좁은 동굴 속처럼 형편없이 자그마했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남는 장사가 물장사라 들었다.

봉이김선달 대동강물 팔아먹은 수단만이 아니라도 주재료가 물인 경우, 거기에 약간의 첨가물만 기술적으로 배합시키면 간단히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술이나 음료수 종류가 다 그렇듯 빵집에서도 커피가 가장 수익 많이 나는 효자품목이라 한다.

가령, 화장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게다.

피부를 곱게 가꿔주는 배합물 자체야 그 정도 고가일 리 없건만 모든 화장품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결국 거의가 거품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공장을 짓고 기계를 넣는 등 아무리 감가상각비 따져봐도 그렇고, 광고비 또한 많이 나가긴 해도 그건 사업자 측 사정.

그리하여 어쨌거나 단기간에 한국 유명 화장품회사는 굴지의 재벌로 발돋움하였으리.

외양 그럴듯하나 순 허풍인 에센스 통을 보며 화장품 회사가 재벌 되는 비법을 가늠할만했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고 눈속임이 횡행하는 사회의 한 단면이 훤히 보였다.

이웃 간에 돌담 위로 찌짐그릇 주고받던 예전엔 명절 때가 되면 계란꾸러미가 서로 오갔고 어른댁엔 굴비두름이 전해졌다.

짚으로 얼기설기 엮은 굴비두름이나 계란꾸러미는 내용물이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싱싱한 계란일수록 껍질이 오톨도톨, 육안으로 다 감식되듯 조그만 조기새끼를 눈속임으로 슬쩍 끼울 수 없는 굴비두름이다.

그 사이 한국도 순박한 농경사회를 지나 빠르게 산업사회로 진입하였다.

명절날 맨입으로 지나칠 수 없는 사이라면 과일상자를 사보냈으며 양주나 홍삼, 송이며 갈비짝은 뇌물급에 속했던 시절.

서민들이 부담 없이 나누는 명절선물로 7~80년대 인기 있는 품목은 3킬로짜리 설탕이나 식용유였던 세월도 있었다.

각종 조미료도, 세숫비누도, 참치캔도, 종합선물세트로 상자갑에 담겨 설과 추석 때마다 잘도 팔려나갔다.

아이들이 있는 집을 방문하며 빈손으로 가기 걸리면, 만만하게 집어드는 게 해태나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종합선물세트로 주머니 사정에 따라 골라 들었다.

그런데 이 종합선물세트라는 것이 포장만 그럴듯하고 상자만 큼직했지 실속을 따지자면 영 별로였다.

겉보기엔 화려하나 막상 뜯어보면 먹잘 것도 없는 허풍선이로, 그만큼 내용물이 부실한 허당이었다.

원색 포장지와 상자갑에다 속을 받친 플라스틱까지, 알맹이보다 쓰레기로 나가는 게 훨씬 더 많았다.

깨진 화장품 병을 보며 문득 그때 생각이 떠올랐다.

하긴 겉만 번드르르한 채 속 빈 강정이 어디 이뿐이랴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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