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바람 소리, 대웅전 풍경소리 수묵화로 번지는 밤. 벽오동 너른 잎이 나직이 수런거리는 위로 유난히 맑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내게 있어 해마다의 백중달은 예사로이 마주할 수 없는 아픔으로 돋는다. 그리움도 깊어지면 아픔이 되는 것을. 생각만으로도 가슴에 흥건히 고이는 뜨거움. 기어이 눈시울 달구고 흐르는 그리움의 여울물 한줄기는 마침내 내 안에서 범람한다. 희다 못해 푸른 달빛만큼이나 사무치는 애수로 스며드는 그리움.
백중절의 달은 어쩌면 결결이 그리움 풀게 하는 달빛이러니. 새하얀 한지에 두 분의 혼백이 모셔져 있는 법당 향해 경건히 손을 모둔다. 그리고 성심으로 불러 모시는 지장 보살심. 지옥의 한 중생까지 남김없이 구원하고자 서원하신 대자비심으로 부디 우리 외숙부님 외숙모님 극락왕생케 하여 주시옵길…… 이것은 몇 해째 변함없는 나의 절절한 발원이다.
오늘은 백중절. 우리 민속에 이른 봄부터 농사일에 부대끼던 농부들이 세벌 논도 매고 비로소 흙 묻은 발 씻고 푸짐한 잔치 벌여 즐기는 날로 되어있다. 그런가 하면 불가에서는 살아계신 어버이의 은혜를 기리고 선망부모나 무주고혼을 청해 넋을 달래고 천상에 나게 이끄는 날이라 한다. 하여 일 년에 단 하루 백중날만일지라도 두 분을 추모하며 기도 올린다. 비록 이것이 마음의 짐 부림이고 다만 자기 위안일 뿐이라 해도 이렇게나마 하지 않을 수 없음은……
오십을 겨우 넘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 먼 곳으로 떠나신 두 분. 내게 베푸신 사랑과 정성은 부모에 버금갔다. 하지만 끝내 그 비슷한 대접도 못 해 드리고 보은의 기회마저 거두신 채 영원히 먼 길 가신 외숙부님 외숙모님. 그리도 사랑해 주시던 그 정(情) 차마 못 떨구고 구천 어디선가 지금도 나를 지켜 주실 두 분. 내가 행복해할 때 같이 기뻐해 주시고 내가 고통받을 때 함께 괴로워하시며 어려움에 처하면 길 열어주시고 편안히 이끌어 주시는 큰 힘, 분명 두 분의 영혼이시리라. 오늘의 내가 건재할 수 있음 역시 두 분의 음덕이리라.
외숙모 등에 업혀 치렀던 홍역은 아마 서너 살 쯤의 기억일 게다. 열꽃에 들떠 보채는 나를 포옥 싸서 업고 둥게둥게 어르며 외숙모는 그때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 형제'라는 노래를 부르셨다. 정말 별이 떴나 하고 포대기 틈새로 내다보니 진눈깨비가 흩뿌리던 추운 날씨였음이 아슴프레 떠오른다. 외숙모는 붓글씨로 장문의 편지를 쓰실 만큼 교육도 받으셨고 범절 바른 분이셨는데 이상하게도 담배를 피우셨다. 아마도 타는 속, 쌓인 한을 담배 연기 속에 훠이휘 날려 보내고자 함이었을까. 배태도 못하신 채 슬하에 한 점 자손을 못 본 아녀자의 아픔. 그 마음속 수심을 그리 푸셨음이리.
외삼촌은 그럴 수없이 온후하신 분이셨다. 자주 나를 무등 태워 앵두도 따주고 매미도 잡게 하던 외숙부님은 대처에 다녀오시면 바둑껌을 통으로 내 손에 들려 주었다. 그뿐인가, 사금파리가 고작이던 당시 귀한 철제 장난감도 사다 주셨다. 텃밭에 가꾼 토마토며 참외도 때깔 좋은 걸 내게 골라 주시고 방물장수가 오면 으레 박하사탕을 봉지째 꺼내 놓던 분. 국민학교에 넣으려고 데리러 온 엄마 몰래 농 속에 꼭꼭 숨던 일곱 살짜리가 나였는가 하면 학교 때문에 집에 보내며 솔밭 배웅길에서 목놓아 우셨다는 외숙모. 이후 방학은 물론 일요일조차 삼십 리 길 멀다 않고 길 닳도록 나는 외삼촌 댁에를 다녔다.
인천에서 미두거래소를 하시다 고향에 돌아와 방앗간을 연 외삼촌 댁은 살림이 넉넉했다. 근동에서는 어디서도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가구나 그릇 등 세간살이가 훌륭했다. 발틀이며 괘종시계, 무용지물이 돼버려 내 좋은 놀잇감이던 전화기에 전기다리미, 장롱은 물론이고 등나무 흔들의자까지 있었다. 당시는 동네에서 급하면 소화제니 머큐롬조차 외삼촌 댁으로 구하러 왔고 신문 보는 집 역시 외삼촌 댁뿐이던 시절이었다.
외삼촌이 발동기 부속 사러 인천 가시면 뒷동산에 올라 하루 걸러 지나는 통통배를 기다리며 곧잘 머리를 긁어 보라 하시던 외숙모. 앞머리에 손을 대면 빨리 오시겠다 좋아하시고 정수리를 만지면 멀었구나 하시며 석양만을 맥없이 바라보던 그 쓸쓸한 옆모습. 인천 나들이 횟수가 그리 잦아지더니 결국 시앗을 본 외삼촌은 딸 하나 아들 하나를 얻었으나.... 그들로부터 자식 노릇은커녕 물 한 그릇 못 받아 자시고 서둘러 저세상으로 가신 두 분. 평생 남에게 베풀기만 하면서 선하게 사셨는데 뒤늦은 외도로 살림 거덜 나고 가정의 평안마저 잃었으니. 제사 하나 제대로 받들 만한 자손도 못 되는 걸 얻고자 그리 크신 희생 치르셨나, 아릿할 뿐이다.
요즘도 나는 살아가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물에 무심할 수가 없다. 풀꽃이거나 그냥 스쳐 지나는 미풍이거나 민들레 씨앗 일지라도 말이다. 기차 옆좌석에 앉은 천진스러운 아기, 또는 봄숲의 뻐꾸기 소리도 물론이고. 더구나 우리 집에 인연 닿은 것은 더욱 그러하다. 언젠가 치자가 꽃을 피웠을 때도 그랬다. 완고히 여민 연둣빛 꽃망울이 쉽사리 풀릴 것 같지 않더니 홀연 잠 깬 치자꽃. 청솔 위에 백로 내리듯 하얗게 핀 치자꽃에서 나는 문득 외숙모의 현신 같은 걸 느낀 적이 있었다.
잊을 수없는 외숙부님 외숙모님. 그 큰 사랑 갚을 길 없고 다만 그 사랑 마음으로 기리며 끝내 소지 올릴 수 없는 그리움일랑 저 달빛에나 띄울까. 하여 언제인가 달빛 그리움 풀어 안개꽃 삼고 카네이션 곁들어 두 분 영면의 자리에 꽃다발이라도 올려야 하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