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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의 낡은 수첩

by 무량화

바람 시원한 지난 토요일. 영어 선생이 자기 생일이라며 집으로 초대했다. 작은 난 화분에 생일카드를 꽂아 들고 갔다. 테라스의 바비큐 테이블로 마구 들이치는 모래바람을 피하려 여남은 명의 손님들은 패밀리룸에 모여들었다. Melting pot이자 Salad bowl이라는 미국 다이 제각각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한국, 과테말라, 알제리, 이탈리아, 스웨덴, 웨일스, 독일, 오스트리아에 집주인은 영국인....



각자 자기소개가 된 뒤라 자연스레 환담들을 나누는 중인데 아델라가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독일 출신이라던 그녀는 나에게 남한에서 왔는지부터 묻더니, 북한의 미스터 김은 문제아라며 머리 위로 빙빙 동글뱅이를 그린다. 남북 분단 상황이나 마찬가지로 한동안 동서독 체제 되어 갈라져 살았던 역사의 동질성이 그녀의 관심을 동양 한 모퉁이의 작은 나라 한국에 닿게 한 모양이었다.



공산권 화제로 줄곧 이맛살을 찌푸리던 그녀가 물러나 앉자, 이번엔 길게 늘어뜨린 은발에 카우보이모자를 쓴 신사가 부산대학을 아느냐고 묻는다. 물론이지, 부산에서 왔고 아들 가족이 부산에 산다고 하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 년 전 부산에서 두 학기 강의를 하느라 머물렀노라고 했다. 장전동 대학가 풍경이며 해운대 신시가지의 초고층 아파트 얘기에서부터 대한민국의 눈부신 IT 산업과 삼성전자에까지 화제는 이어졌다. 그는 현대화되고 깨끗한 인상으로 남은 한국을 좋아한다며 기회 되면 또 가고 싶은 나라라고 했다. 물론 기분 나이스였다.

그 자리엔 특별한 분이 앉아 계셨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내내 말없이 뒷전에 물러나 앉은 할머니는 96세 되셨다는 이 댁의 시어머니셨다. 함께 지내는 건 아니고 며느리 생일을 축하하러 한 시간 넘어 거리에서 오셨다고 한다. 과거 그분의 비서였다는 글로리아는 주름 자글자글하나 한 미모 하는 귀엽고도 상냥스러운 부인이었다. 젊어 한때는 반짝이는 빛무리에 싸여있었을 법한 용모였다. 연배에 비하면 정정한 편으로 지금도 꼿꼿하니 위세 잃지 않는 헬렌 할머니 옆에서 식사를 거들기도 하던 그녀가 낡은 타자기를 가리켰다. 그 타자기는 자신이 사무실에서 항상 다루던 손때 묻은 친구라고 했다.



할머니는 부친이 운영하던 은광을 물려받아 사업을 한 여장부로, 책장에 든 작은 타자기는 자기 전용이었다며 잠시 아늑한 시선을 보냈다. 앞강물 밀면서 뒷강물 따라와

다시 밀리고 밀려가고... 그렇게 육신은 늙어 기력이 달리니 지팡이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온전한 정신력에 건강이 그만만 해 혼자 힘으로 운신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젠 속절없이 뒷전으로 물러나 무료하게 지내며 고이 눈 감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노인. 창밖 눈부신 햇살이 무색하게 그분의 희미한 미소는 고적감 그 자체였다.



낡은 무도회의 수첩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저마다 찬란한 한때가 거기 있고 세상을 호령하며 잘 나가던 한 시절이 그곳에 있을 터. 세월은 약이기도 한 반면 무자비할 정도로 단호한 칼이다. 전혀 예외자 없이 아주 공평하게 그러면서 사정없이, 시간은 강철 같던 무릎을 녹슬게 만든다. 아무리 용을 써봐도 나이 들어 노인이 돼 갈수록 더 이상 내일을 향해, 꿈을 향해 달릴 수 없게 된다. 집착했던 세간사 내려놓고 하늘의 부르심에 순명해야 할 때에 이르면 부디 고요히 선종할 수 있기를.




사회적 위치나 역할이 사라진 마당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내 나이가 어때서? 안간힘 부림은 차라리 처연스럽다. 대찬 여걸이셨다는 96세 노인의 오늘을 보니 낡은 타자기나 마찬가지, 자못 심사 착잡해진다. 아니 망연해진다. 아아, 못 면할 손 인간에겐 생로병사(生老病死) 요, 세상 만물은 생송이멸(生成異滅)하며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거늘!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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