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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깡 공작

80년대 일기장

by 무량화

올해도 예외없이 불볕 더위 여름과 함께 맞이했던 방학. 그동안 큰 아이는 보이스카우트 캠핑에 며칠, 바캉스 계획에 또 얼마, 이어서 외갓집 나들이로 사십 여일 간의 방학을 모두 채우고 이제 개학이 낼 모레. 일정한 과제물이 주어지는 대신 자율 학습 숙제로 바뀌어진 방학이다 보니 부담없이 놀 만도 하였다. 더구나 무더운 계절 탓에 차분히 앉아서 공부하기보다는 물놀이가 더 적격 아닌가.


사실 국민학교 방학 때나 맘껏 뛰놀고 여행도 하며 자연 속에 묻힐 수 있을 뿐. 특히 여름방학은 실제 현장학습을 통해 직접 경험의 기회가 되도록 이끌어 주라고도 했다. 제 스스로 보고 느끼고 확인해보는 기쁨을 마련해주라는 뜻이다. 무척이나 긴 듯 싶던 방학 기간. 그동안 밖에서만 지내던 아이는 개학을 코 앞에 두고 뒤늦게 동분서주 숙제로 바쁘다. 생활계획표는 혼자 책상머리를 지키며 붙어있고 예정 대로라면 벌써 마무리됐어야 할 「명화 모으기」도 어제야 겨우 제자리 찾아 들었다.


오늘 아침, 숙제 재료 살 이백 원이 필요하다는 아이의 말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한 게 있는 가를 물으니 수수깡 사다가 만들기를 한단다. 돈을 받자마자 쏜살같이 문방구점으로 달려가 수수깡을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곤 개척 시대 미국 영화에 흔히 나오는 통나무 집을 만든다며 모형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창문은 어디에, 굴뚝 높이는 얼마 쯤, 하며 한참을 구상하더니 드디어 만들기 시작했다. 수수깡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핀으로 연결하고 고정시키며 집 한 채를 만드는데 시간은 길게 걸리지 않고 오두막은 완성되었다.


공작 재료인 수수깡. 그것은 내가 여지껏 알고 있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자연 그대로의 수수깡 대신 스치로폼 비슷한 재질에 일곱 가지 색이 곱게 물들여져 포장 속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수수깡 대용품. 언뜻 보기엔 파스텔로 착각할 만큼 일정한 규격에 색채도 무척 산뜻했다.


요즘은 학습 자료 대부분이 쓰기 좋게 또 편리하게 만들어져 나오기에 문방구에 가면 어떤 것이든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연을 만들 때도 창호지와 대나무를 애써 준비할 필요 없이 구비된 재료를 사서 설명서대로 조립해 만들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든 과정보다는 결과에만 치중하게됨도 바람직하지 않고 편리한 것에 습관화 되면 안일 만을 추구하게 되지 않을지. 또 하나, 돈이면 어느 것이나 간단히 손에 쥘 수 있다는 사고방식도 경계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방학 때 공작 숙제하려면 큰 비로 패여진 언덕길에서 마치 광맥처럼 뻗어있는 찰흙 줄기 찾아 조심스레 파 모아 동물도 만들고 탑도 만들던 기억. 그외 수수깡은 시골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소재로 해묵은 채 밭 귀퉁이나 헛간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그중 너무 통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알맞은 대를 골라 몇 동강 다듬어 가지고 와서 갖가지 모형 만들며 손도 여러 번 베었었지.


하지만 요즘 이런 도시 공간에서 학습에 필요한 여러 준비물을 얻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물체 주머니란 것. 그 속에는 자연시간에 필요한 사포지며 톱밥에 단추 종류까지 들어있다. 물론 찰흙도 비닐 포장된 채 상품화되어 있고 심지어 크고 작은 나무 토막도 문방구점에는 갖춰져 있다.


곤충을 잡아 부패 막는다며 조그만 병에 든 알콜 사다 주사침 꽂는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는 요즘 아이들. 그에 비해 식물채집 한 것을 신문 켜켜에 넣어서 다듬이 돌로 눌러 놓았다가 며칠 뒤 맘 조이며 들춰 보던 우리 어릴 적과는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햇님 달님 전설 속에 호랑이가 떨어져 죽었다는 수수밭. 그래서 붉으레졌다는 수숫대. 지금쯤 늦여름 따가운 햇살에 낱알 영글리며 지나는 바람결에 긴 이파리 서걱대고 있겠지. 아이가 남긴 수수깡을 모아 막내의 안경을 만들고 있는 내 손끝에 녹빛 풍요로운 자연이 어른거린다. <82. 대구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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