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일기장
햇살 여려진 오후. 딸아이를 데리고 시장엘 갔다. 풋마늘에 미끈한 무, 햇감자가 쌓인 채소 전을 지나 딸기 토마토 등 때깔 먹음직스러운 과일전에 들어섰다. 그때 아이의 눈에 이상한 열매가 보였던 모양이다. "엄마, 저건 첨 봐. 이름이 뭐야?" "응, 오디라고 하는 건데 뽕나무 열매란다." "먹는 거야? 맛있어?"
낯선 것에 대한 아이의 질문은 계속됐다. 생물도감을 펼쳐놓고 설명해도 모자랄 정도로 묻는 말은 꼬리를 물고 내 대답은 점점 시원치 않다. 단 한 번이라도 실제로 밭두렁에 서 있는 뽕나무와 그 잎을 먹고 자라는 누에를 보여줌이 효과적인 산교육이라는데 도회에 살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신 마음 깊이 무늬져 아롱지는 내 유년의 추억을 들려줄밖에는.
내 아이만 했던 어린 시절. 오동나무 은은한 꽃이 피는 이맘때면 오디가 익어 낮은 가지를 휘어잡아 주시던 외삼촌 덕에 입언저리가 보랏빛 되도록 그 달콤한 맛에 젖었었다. 그 후 교직에 들어서 시골 학교에 부임했던 봄. 춘곤증인 듯 졸음에 겨운 한 학생의 일기에서 '교복 벗기 바쁘게 뽕잎 따고 누에 돌보기에 저녁 시간 다 보낸 뒤 밤새워 숙제하고 나면 교실에 앉아 있어도 자꾸 오는 잠'이란 내용을 읽고 안타까워했던 기억.
그들은 농번기에 삼사일 주는 가정 실습 때면 여학생이라도 거머리 헤엄치는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땡볕 아래 밭을 매야 하며 새참 바구니를 날라야 했다. 모내기, 보리 베기, 밭매기 거기에다 야산이 많은 충청도 지방에선 층계식 뽕밭을 만들고 누에를 키워 농가 소득에 보태고 있었으니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란 말이 과장만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무렵이 농촌에선 가장 바쁜 철. 모심는 일당이 얼마여서 오히려 도시 근로자가 시골로 원정 가는 역류 현상까지 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또 군 관 민의 농번기 지원 봉사가 의존의 병폐를 키운다는 지적도 있으나 극히 일부에 국한된 얘기리라. 하긴 도와주러 온 사람들의 익숙지 못한 솜씨 때문에 두벌일을 하게 하는 번거로움으로 농촌에선 오히려 도움을 사양한다던가.
우리는 옛부터 상부상조하는 미덕이 있어 이웃끼리 돌아가며 힘을 합해 일하는 품앗이가 있었지만 근자의 농촌 실정은 심각한 이농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다. 도통 일 할 젊은이가 없어 일 때를 놓치기도 한다는 농촌. 아! 그렇구나. 여태껏 나와는 무관한 별개의 지역으로 알았던 거기에 내 작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 곳 있는지도 모른다. 가을이면 찹쌀이랑 참깨랑 올망졸망 싸 주시던 시숙모님께 이번에 조그만 힘으로나마 답례를 하자.
우리는 대구에 살고 있으며 시숙부님 댁은 달성이다. 시골 일을 할 줄 모른다고 명절에 가도 가만히 앉혀만 놔두시던 그분들이 지금 한창 바쁜 철임을 왜 진작 생각 못 했을까. 비록 손에 안 익은 농사일은 거들지 못할지라도 참 준비나 뒷설거지, 하다못해 완두콩 까고 상추 씻는 일이라도 도와드려야지. 그리고 다섯 살짜리 막내에게 무논의 개구리 소리도 들려주고 뽕나무 그늘에서 오기도 찾아봐야지. 쌀나무 아닌 벼포기가 어떻게 자라 쌀이 되는지 역시 눈으로 읽게 해 줘야지.
아 아- 투명한 냇물에 맑은 공기, 산과 들의 신록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며 벌써부터 우릴 기다리신듯 반가이 뛰어나오실 시숙모님의 진솔한 미소가 가슴에 스며든다. 1982. 대구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