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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이 무한정 걷다가

by 무량화

강풍주의보가 발령된 날이었다.

그럼에도 하늘 푸르고 날씨 청량, 어디든 떠나보라고 날씨가 부추겨댔다.

거친 파도 백마 군단처럼 밀려드는 간절곶이나 임랑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울주 간절곶까지 왕복으로 걷는 게 무리라면 파도 일품으로 서핑 명소라는 임랑 해변 찍고 와도 괜찮겠다.

정한 목표 꼭 채워야 할 이유도 없고 설렁설렁 걷는 데까지 걷다가 힘에 부치면 아쉬울 거 없이 되돌아오는 거다.

갈맷길 따라 이천 동백 온정 신평 칠암 문동 임랑 월내 고리 서생 지나 간절곶이다.

트래킹화에 배낭 멘 채 채비 단디하고 집을 나서니 거센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송림과 잡목 사이로 짙푸른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해안길 걸으며 이모저모 사진에 담느라 늘어질 대로 늘어진 시간.

세월에, 세간사에 구애받을 거 없으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자유인의 신선놀음 이에 무얼 더 바랄손가.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드메뇨, 얼쑤~

물외한인으로 유유자적, 걸림이 없어 좋은 나날이다.

무슨 공덕 쌓아 이런 호사 누리는가 그저 하늘에 감사드릴 따름.

동백마을 자갈밭에선 탐석객에 섞여 그러나 거리 두기 철저히 지킨 채 잠시 기웃거려 본다.

수석 문외한인 어설픈 눈에 심봤다! 산삼 만나듯 격조 어린 귀석이야 탐할 수 없고 동글동글 자그만 문양석 두엇으로 만족키로 한다.

심미안 갖춘 바 없이 생억지로 돌만 집었다 놨다 반복한 셈이다.

소장할만한 명품 기대하기보다 단지 잠깐 수수만년 일월에 깎이고 닳은 자연과의 교감만은 즐길만했다.

쉬엄쉬엄 신평 돛대공원에 오르니 저 멀리 아슴하게 고리원전 돔이 보였다.

비릿한 칠암 포구에는 해풍에 쫓긴 갈매기떼 어수선히 날아다녔다.

같은 동해라도 어디는 해송 어우러진 기암괴석 해변, 고깃배 넘나드는 어장, 미역 양식장 품어주는 해안, 고운 모래사장 반달처럼 깔린 해수욕장, 때로는 잔잔하고 청청하게 가끔은 묵직한 잿빛으로 누워있는 바다....

모랫벌 시원스러운 임랑 해안가, 너울너울 쉼 없이 밀려와 장쾌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장관이다.


집에 갇혀 갑갑하던 아이들은 해변에 풀어놓으니 마구 뛰어다니며 숨길 틔운다.

어른이라고 예외랴, 마조히즘이라면 모를까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억지규제에 묶여 활동이 제약받자 화가 스멀스멀 피어오르지 않던가.

난데없이 덮친 역병 코로나만 아니라면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오랜만에 돌아온 우리나라 남도지방 맘껏 향유해 보련만.

이십여 킬로 걸으면서 잠시도 앉지 못했는데 임랑해수욕장 편안한 벤치가 보기엔 깨끗하나 누가 앉았을지 몰라 경계부터 된다.

월내 바닷가 언덕에 서니 태풍급 강풍이 막무가내로 몰아친다.

방파제에 부딪히며 포효하는 집채만 한 파도의 포말이 이 차선 도로 넘어와 예까지 튀어 피부가 찹찹해진다.

기갈 센 바람은 가벼운 체중 하나쯤 거뜬히 넘어뜨릴 기세다.

시내로 들어서도 바람은 마찬가지, 현수막이 미친 듯 나부끼고 공사장 베니어판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삐꺼덕거리며 요동치는 간판이 떨어질 거 같아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한다.

원전 삼거리에 이르자 울주 지방으로 넘어가는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고속도로변) 상황상 전진이 어렵다.

간절곶은커녕 서생 진입조차 접고 미련 없이 뒤돌아선다.

이미 해도 설핏해졌다.

갑자기 돌아갈 일이 난감해진다.

그렇다고 버스나 택시 탈 뜻은 추호도 없던 것이, 다중이 이용하는 터라 애당초 탈 생각은커녕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시국이다.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이번엔 올 때와 반대로 바람을 안고 걸어야 하니 한결 힘이 든다.

다리는 점점 묵직해오고 생전 안 아프던 허리도 뻐근한 느낌, 터덜터덜 패잔병 꼴로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

익히 아는 길이라 겁날 것도 없고 걷다 보면 집에는 틀림없이 도착할 테니 서두르지 말고 슬슬 가보자.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아들이었다.

퇴근길에 집에 들르려 하는데 지금 어디세요?

어구구~구세주가 따로 없네, 나 지금 문동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 중인데 다리 아파 안 되겠다. 데리러 와주라아.

근처 카페에 들어가 기다리세요, 곧장 갈 테니요.

카페 이용할 거 같으면 진작에 택시 불러서 갔지 야야! 대중과 섞이지 말라는 비대면 세월 아니면 이 쌩고생 하겠니.

코로나 시국인 데다 결벽증에 가까운 못 말리는 엄마 성격 아는지라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희망이 있어서인지 어렵잖게 이십여 분 내처 걷다가 마주 오며 깜빡이 넣는 아들 차를 만났다.

이미 해는 지고 어스름 깃든 시각, 늦었는데 저녁식사하러 가시죠.

울산 방향인 남창에 있는 식당으로 내달렸다.

차창 오른쪽으로 검은 구름 같은 게 뭉텅이로 밀려다녔다.

저건 뭐지?

모르셨어요? 울산 바닷가 쪽에 산불이 크게 나 오후부터 진화작업에 들어가 지금은 잔불처리 중일걸요.

무심결에 세상에나! 아니 하필이면 강풍 이리 부는 날 산불이라니 ㅉㅉ.

이때부터 나지막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옷차림도 허술해 보이는데 괜찮으세요? 강풍주의보 내린 날 그 먼 길을 걷다니요.

병원 선별 진료소 가건물이 날아간 곳도 여럿이고요, 간판이나 케이블 선이 떨어져 상해 입었다는 뉴스가 빈번한 날이에요.

여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머쓱해져서 어물쩍 얼버무리고 말았다.

순간, 집 나와 길거리 헤매는 치매노인 찾느라 가족들 애태우는 영상이 떠오르며 무개념 할망의 일탈이 민망스러워졌다.

잔소리 아니 통박 핀잔 지청구 들어도 싸다 싸. 당연히 한소리 들어 싸다마다...

돌이켜보니 참말로 무모함 무지함에서 비롯된 경거망동이었다.(반성문 열 장꺼리)

그렇게 23킬로 3만 4 천보를, 그것도 강풍 맞으며 오후 내내 걷고 또 걸었던 것.

갈맷길 서쪽 방향으로 죽성 마을 다녀왔을 때보다 3 천보 가량 더 걸었을 뿐인데 한층 힘든 이유는 역시 바람 때문.

아니 코로나 탓이라 우겨본다.

聖人之道 責己不責人, 성인 흉내조차 못 내는 소인배라서 핑계부터 대는 거 맞다. ㅎ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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