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맥이 달음질쳐 와 우뚝 멈춘 발걸음 아래 드리워진 섬진강. 그 지류의 한줄기 투명한 물살을 끼고 지칠 줄 모르게 이어지는 숲길. 몇 구비 산자락 돌고 돌아 팔십 리 골짜기를 더듬어 오른 곳이 묵계리였다. 거기에도 또 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나있었다. 그 아슴한 황톳길에 이글거리던 불볕. 산기슭은 한창 녹음이 익어 갈매빛 수해(樹海)를 이루었다. 그러나 숲은 한결같은 푸른색이 아니었다. 각기 나름대로 고유의 빛깔을 머금은 채 짙고 옅은 색의 조화를 이뤄 마치 점묘법(點描法)의 화풍을 보는 것 같았다.
가슴께서 서걱거리는 수풀. 얼굴을 때리는 잡목림. 그렇게 지리산 삼신봉행은 시작되었다. 숲은 외길이었다. 풀숲 사이로 조심스레 이어진 조붓한 길. 풀 내음이 싱그러웠다. 이름 모를 야생화가 앳된 미소로 피어 있었다. 숲 어디쯤인가 숨겨진 둥지에서 산새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산허리 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골짜기의 폭포 그 작은 나신(裸身)이 하얗게 빛났다. 천상과 이어지는 두레박 끈이라도 놓여 있음 직한 벼랑 아래 소(沼)에서 울리는 물소리가 신비를 보태는 산간(山間).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은 가뭇없고 뒤돌아 보면 길조차 지워진 채 무성한 칡덩굴, 산딸기 덤불만 엉클어졌다. 마치 굼실대며 승천하는 청룡같이 짙푸르게. 겹겹의 정적을 헤치면 거기 생명의 피솟음을 느끼게 하는 풀 향기 그리고 솔바람이 있었다. 달빛에 젖고 별빛에 취해 수십 억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두류(頭流)의 체취 같은 것이. 녹음 그늘에 가녀린 줄기 곧추세우고 자잔한 꽃잎을 연, 한 무리 꽃들로부터 생명에의 순수한 애정도 익혔다. 숲을 스치는 청풍(淸風), 계곡에 여울지는 백수(白水), 신록같이 순한 죽림(竹林) 어우러진 지리산. 그 가운데 서니 속인(俗人)으로서 감히 무념무상(無念無想)까지는 못 미쳐도 마음 정결히 헹구어지는 것 같았다.
역시 길 떠나길 잘했어. 이토록 가슴 트이게 맑고 푸르른 호흡을 할 수 있음은 얼마나 기꺼운 일인가. 아둥거리고 조바심치며 쫓기듯 살아온 일들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인간의 끝 모를 욕망 위에 매달린 부표(浮標)는 손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떠있었다. 해서 날개 잃은 새처럼 네모진 시멘트 공간에 유폐되듯 지내온 일상이라 불평했다. 의식 없는 미라처럼 참 생명을 박제당하고 살아온 생활이라 푸념했다. 그래도 무의미한 타성과 나태와 혼미에의 침식은 철저히 거부할 줄 알았다. 집착과 갈망과 그로 인한 번뇌와 애증의 목마른 고통 가운데 질식해 쓰러질 듯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주는 빛의 줄기 그 한 끄트머리를 붙잡고 견뎌온 나날이었다. 우리의 삶이란 늘상 채워지지 않는 소유욕으로 아파하는 것. 전부를 버릴 때 충만한 자유와 만족이 있다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발길이 한결 가볍다. 그리던 님 만나려는 듯 설레기조차 하는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남녘의 영산(靈山), 둘레가 팔백여 리에 골마다 명승 절경.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여기 머물면 지자(智者)로 바뀐다 하여 지리산이라던가. 드디어 정상에 올라섰다. 그리던 가인(佳人)은 보이지 않고 한없이 펼쳐지는 산만 있었다. 위로는 하늘이 있었다. 눈앞에 구름밭이, 안개가 이어졌다. 바람은 능선을 타고 원시림과 고사목 지대를 핥았다. 겹겹이 포개어진 연봉 너머 또 산, 산, 산. 의연히 때로는 우람하게 어디선 다소곳이 솟아있는 봉우리들. 하늘로 향하고자 하는 하많은 대지의 염원인가, 도전인가. 어느 봉은 구름 속에 잠겨 깊은 명상 삼매에 잠겼고 어느 곳은 하늘과 맞닿은 채 신(神)의 강림이라도 기다리는 모습이다.
구름과 안개로 매 순간 달라지는 가히 놀라운 경관. 한낱 범속한 시정인(市井人)으로선 감탄의 말도 외람되고 그저 경건함으로 고개 낮춰 침묵할 밖에는. 대자연의 위용을 접하면 인간 능력의 보잘것없음을 새삼 느낀다. 하물며 문자나 언어, 그림이나 사진임 에랴. 산정에서 감지할 수 있는 건 차운 바람이 세파의 오탁을 씻어줄 듯 휘감고 있다는 것뿐. 손가락 끝 저 멀리 아련한 보랏빛 윤곽으로 서있는 노고단 반야봉이 가물가물 아득하다. 그 산줄기 타고 안온한 계곡에 자리했다는 화엄사. 어쩌면 새벽 범종의 여운이 예까지 들릴 것만 같다.
언젠가 사진전에서 보았던 지리산 종축장 양 떼는 어디쯤 있을까. 굼실거리는 뭉게구름이듯 드넓은 평원에 석양 비껴 받으며 풀 뜯던 평화로운 모습. 거기 고독의 화신인 양 홀로 선 목동의 어깨에 내리던 산노을빛 무게가 문득 생각난다. 우뚝 다가선 앞산 바윗전이 다시 운무 사이로 숨는다. 일순 희뿌연 물결이 파도치듯 밀려와 시야를 막는다. 잠시의 단절 그리고 다시 트이는 전망. 지리산은 웅대한 장편 서사시이고 장엄한 교향악이란 말이 실감된다.
여기 이렇게 서있으니 정녕 흐르는 바람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살고 싶어졌다. 식물 되고저, 아니 무정(無情)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한방울 이슬로 잦아들고 싶었다.
아아, 바위 곁에 굳어진 또 하나의 바위이고 싶어.
조촐히 피어난 한 떨기 산꽃이고 싶어.
옥류에 하얗게 씻겨진 조약돌이고 싶어.
산기슭에 뿌리 깊은 소나무이고 싶어.
이름 모를 산새여도 좋을 것 같애.
그늘에 묻힌 조그만 들풀이어도 좋을 것 같애.
시간도 형체도 모두 녹아져 여기 이대로 영원히 정지해 머물고 싶구나.
시나브로 스며드는 솔바람 숲향기. 그로 인해 내게서도 푸른 물이 듣는 듯하다.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