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차이점

by 무량화

어느 날 학교에서 자신의 목표를 다섯 개씩 써오라는 과제를 내줬다. 다음날 발표 시간이다. 대부분 첫째 목표는 영어 정복하기다. 우선 영어부터 다진 다음 칼리지를 가겠다, 좋은 직업을 찾겠다, 시민권 시험을 치겠다, 자기 비즈니스를 열겠다, 간호사 준비를 하겠다, 결혼을 하겠다, 집을 사겠다 등등 제각각이다. 그 많은 목표들을 언제까지 어떻게 실현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도 소상하게 내놓았다.



2~30대의 젊은이들은 이루고자 하는 꿈이 다양했다. 반면 나이 든 층은 목표삼을 목록이 두서넛으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우리 클래스에는 스무 살짜리부터 여든세 살 짱짱한 할머니도 있다. 삼십 년 전 쿠바에서 왔다는 카나시온이 최고령자이며 일흔여덟의 인도 출신 파비스도 있으니 나 정도는 나이 축에도 못 낀다. 이렇듯 비교적 젊은(?) 편임에도 앞으로 이뤄야 할 나의 꿈은 셋을 넘지 못했다. 처음은 물론 영어 독파, 그다음 목표는 영시 쓰기이며 세 번째는 좀 길었다. 만일, 이란 전제를 붙인 다음 요셉보다 더 오래 살아 혼자 남는다면 인디언 마을에 들어가 토속 인디언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꿈을 야무지게 말하자 다들 와우~환호를 보낸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차이는 별게 아니었다. 꿈꿀 수 있는 미래가 무한대인 젊음, 미래가 그렇게 많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나이 듦. 젊은이들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영역들이 무궁한 반면, 나이 든 이들은 이미 경험해 보았거나 진작에 실현시킨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차이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일을 찾아보고 이룰 수 있는 기회나 가능성은 적어졌지만 대신 그만큼 안정되고 여유롭다는 것이 나이 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늙는다는 건 솔직히 맥 빠지는 일이긴 하나 반면 매인 데 없이 홀가분해진다는 의미도 갖는다. 좀 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늙은이는 자연이 준 숙제를 이미 마친 사람이고 젊은이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유용성을 지닌 존재다. 즉 세상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과거형과 효용가치가 있는 미래형의 차이겠다.



'늙음'이 등 뒤에 찰싹 붙어있다는 게 은근 신경 쓰이는 듯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다. 누구나 먹는 나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태어난즉 멸하기 마련이다. 그 무엇도 이 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만치 나이 들면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나타나는 늙음을 유독 의식하는 저간의 사정이 궁금했다. 혹시 몰두 중인 연구과제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몹시 걸리는 무언가가 있거나 건강 상태가 여의치 않은 걸까, 혹은 쌓아둔 재물이 무진장 많아서일까, 가족에 대한 애착이 깊어서인가? 늙음/쇠함을 안타까이 느끼게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내심 여러 상상을 해보며 그간 별로 의식지 않고 살던 젊음과 늙음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게 되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 첨언을 하자면, 이 얘긴 어디까지나 건강을 잃은 상태 또는 극빈층이 아닌 보통인 대상임을 전제로 한다. 건강이 나쁘다거나 절대빈곤의 경우는 노소는 물론 남녀를 막론하고 비참하며 불행스러운 고통이긴 마찬가지이니까.



어린이, 젊은이, 늙은이의 '이'는 의존 명사로 ‘사람'의 뜻을 나타내는 명사다. 그러나 늙은이라는 말이 낮춤말 같다고 하여 대신 노인장, 어르신으로 보통 칭한다. 다만 여기선 젊은이의 대칭어 의미라 그냥 늙은이로 표기하겠다. 흔히 늙은이들은 무기력하고 완고하고 폐쇄적이며 SNS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굼뜬 세대로 비하한다. 하지만 오랜 삶의 경륜을 걸쳐 터득한 인생의 지혜를 배우려면 나이 든 이를 찾으라 하였다. 젊은이는 흔들리고 방황하나 늙은이는 이미 많이 부딪히고 깎인 경험을 통해 노련하게 느긋함을 누릴 줄 안다. 따라서 노년기는 일평생 중 가장 여유롭고 자유스러운 인생의 황금기로 골든 에이지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기본 재력과 건강은 물론 필수다. 정녕 얼마나 좋은 시절인가. 젊을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취미를 살려볼 수 있는 시기, 지니고 있는 소질과 경험을 적절히 일과 연계시켜 역량껏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인 때다. 진정한 골든 에이지가 되려면 먼저 심신이 건강해야 하고 세상일에 불만을 갖기보다 매사 긍정적으로 대하려는 자세야말로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겠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철학마다 관점에 따라 인생을 다각도로 논해왔으나 귀착점은 대동소이하다. 머리 싸매고 이리저리 파헤쳐 봐도 결론은 한결같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즐거이 살다 가라는 거로 집약된다. 우리는 Homo Ludens다. 이왕이면 여러 가지 놀이를 멋지고도 맛나게 하면서 즐기다 가고 싶다. 나이는 많아도 쇠하지 않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 전진하는 사람은 비록 늙었어도 젊게 사는 노인이며, 나이 새파란 청춘이라도 뚜렷한 삶의 비전 없이 의욕을 잃은 채 산다면 젊지만 이미 노인이란다. 몸이 늙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나 정신이 늙는 것은 스스로 책임질 일이라 하였다. 정신이 늙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창조적인 생각을 하라고 이른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만들지만 사라진 열정은 영혼에 주름을 만든다.



사무엘 울만이 읊기를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이로움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환희심이 있다고 하였다.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깃발을 잡고 있는 한 여든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고 노래하였다. 생물학적 나이야 얼마가 되건 상관없다. 꼭 나이가 적어 젊은이가 아니고 나이가 많아 늙은이도 아니다. 의욕이 없고 도전정신이 없고 배우려는 의지가 없으면 젊어도 늙은이요, 호기심과 창의력과 성취욕이 있으면 늙어도 젊은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도전할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늙어간다는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얼마나 경이로운 세상인지 하루하루를 경탄으로 맞는다면 그는 젊은이다.



나이 들어 말이 많아지면 주책병의 시초라는데 행여,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고집을 부리거든 부디 강력 조치를 해달라고 진작부터 딸에게 당부해 두었다. 사물의 시비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이성이 흐려지지 않을 때까지는 잡문도 끄적대고 블로깅도 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즐기련다, 물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봉사활동이나 보다 바람직한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생의 후반부를 건강하게 엮어갈 작정이다. 장자는 말했다. "삶을 좋아함은 미혹이 아니겠는가, 또한 죽음을 싫어함은 마치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갈 길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늙음을 싫어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가 왔던 곳, 본향으로 돌아가는 어느 길목을 지나는 중인 지금 아닌가. 건강 유무도 장수도 사람의 관할 밖 사항이다. 하늘의 도우심을 청하며 그저 칠성판에 눕기 전까지 우리가 할 몫은 순간순간 최선 다해 열심히 그리고 감사하며 살되 모쪼록 즐거이 살 것, 그뿐. 201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