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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9. 2024

暮色(모색)

Amish villag

순간, 아득히 흘러가 버린 옛 기억 한 자락이 되살아났다. 반세기 가까이 된 유년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놀러 간 외가에서다. 허리 굽은 배롱나무 연분홍 고운 꽃에서 향마저 혼몽스레 번지는 저물녘. 바심 끝난 보리밭 갈아엎고 돌아오는 어미 소를 기다리던 송아지 바야흐로 보채대는 시각쯤이다.


붉은 댕기를 들였던 것 같은 외사촌 언니는 저녁 지을 보리쌀을 자배기에 쓱쓱 치대고 있다. 시린 물 찰방찰방 넘쳐흐르는 돌샘, 층층 고인 청석에 낀 연둣빛 이끼가 바가지 질 할 적마다 순하게 한들거린다. 물꼬 따라 뽀얗게 떠내려가는 뜨물 속에서 송사리 떼는 이리저리 자발없이 나댄다. 그걸 잡겠노라 포푸린 원피스 뒷자락 젖는 줄도 모르던 어린 나. 어서~ 똬리 얹어 달라는 언니 채근에 고개 들면 먼 산자락에서부터 우련하게 스며드는 이내 빛이 금세 우릴 에워쌌다. 쓸쓸하기가 강 안개 같은 푸르스름한 이내 속에 들면 자못 감상적이 되며 움쑥 철이 드는 것도 같았는데.


배경은 다르지만 바로 그 이내 빛에 잠겨 있는 마을 아미시 빌리지(Amish village, Lancaster County, Pennsylvania)를 지나는 중이다. 듣던 바대로 시간이 화석화된 과거 속의 세상이다. 중세를 무대로 한 대형 연극 세트장, 아니 어쩌면 내가 영화를 보고 있거나 꿈을 꾸고 있는 듯도 싶다. 현대 물질문명으로 매끄러이 포장된 필라델피아와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다. 탐욕과 퇴폐가 꽈리를 튼 번잡한 도시, 걸핏하면 총질이 벌어지는 살벌한 도시 바로 곁에 이토록 목가적인 전원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밀밭 짙푸른 물결 파도치는 들녘에 띄엄띄엄 농가와 목장을 거느리고 곧게 나있는 이 차선 도로를 달린다. 곁에는 또가닥거리며 마차가 지나간다. 처음 이주민이 정착했던 18세기 초 그대로의 속력이다. 당시의 서구는 각 제국마다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던 시기. 때를 같이 해 종교 탄압을 받던 유럽의 여러 종파 교단들이 피난처로 택한 신대륙이다. 무상으로 토지는 물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펜실베니아에, 그렇게 신교도 아미시들이 뿌리내리게 됐다.


기존의 엄격한 교리를 기준으로 그들만의 전통에 따라 삼백 년 세월을 변함없이 살아가고 있는 아미시들. 언어와 교육방식은 물론이고 옷 스타일이며 하다못해 마차 색깔까지, 일률적으로 정해진 종교 지침서대로 그들은 한치 거슬림이 없다. 남자는 군청색 멜빵바지에 텁수룩 수염을 기르고 맥고모자를 쓴다. 여자는 전형적인 필그림 풍의 복식이며 앞 가르마 단정한 위에 케이프를 두른다. 아이들의 푸른 셔츠까지 통일된 차림새로 하나같이 규정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아미시와 비슷한 곳으로 지리산 청학동에 도인촌이 있었다. 이십 수년 전 그곳에 갔을 때도 여름. 기운찬 계류 소리 동반하고 길가까지 흘러내린 칡덩굴 헤치며 찾아간  청학동엔 푸른 학 대신 조선시대가 깃을 치고 있었다.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이 고스란히 펼쳐졌던 그곳. 두루마기에 상투 틀고 갓 쓴 서당 훈장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입성은 질박한 무명 한복이었다.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청학동은 우리가 꿈꾸던 무릉도원 같았다. 색다른 것을 찾는 도시인들의 기호에 맞는 나들이 터로 그 마을은 줄곧 북적거렸다. 고즈넉하기 그지없던 그들의 터전이 번다히 외부에 노출되면서 마을은 순결을 잃어갔다. 고유의 전통은 점차 퇴색되기 시작했으며 문명세계와 접한 이후 하나 둘 마을을 뜨는 젊은이가 생겨났다.


그들에게도 유불선(儒佛仙)을 근간으로 한 나름의 종교가 있었다. 허나 그것은 이상화된 관념 정도의 수준일 뿐 정신적 지주로서 숙성되지 못했던 때문인가. 깐깐하기까지 하던 청학동의 독자성은 속절없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감이 드는 반면, 아미시는 오랜 세월 그 어떤 외풍에도 전혀 미동치 않는 결속력으로 끄떡없어 보인다. 모둠살이에 의례히 따르기 마련인 내부 갈등이나 모순이, 그들이라고 전혀 없진 않을 터. 그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고 봉합시키며 일체 이루게 하는 힘의 실체는? 세상 어디에 섞여 살지라도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무슬림은 무슬림이듯, 아미시가 아미시로 살 수 있음은 이념이나 사상을 월등 능가하는 그것, 뿌리 깊은 신앙이 구심점 역할을 한 까닭이리라.  


아미시들의 주업은 농사와 목축업, 퀼트와 목공예는 부업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일반적인 기초지식 습득으로 충분하니 8학년 과정이 전부다. 고등교육까지가 의무교육인 미국이지만, 교육의 의무에 앞서는 것이 종교의 자유라고 법원은 진작에 그들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동이 트기 전 일을 시작하는 부지런함에다 자급자족으로 얻은 자연식의 담백한 식문화로 비대한 사람은 없으나 의외로 안경 낀 이들이 흔하다. 그만큼 독서열이 대단하다는 그들이다.


아미시는 몸에 밴 상부상조 정신으로 각국 구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또한 전쟁을 죄악시해 징병을 거부하고 미국 땅에 살면서도 일반 미국인과의 결혼은 불허한다는 그들. 그렇다고 배타적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 고립되어 사는 건 아니다. 호기심 많은 외부인들에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거부감 없이 공개하는가 하면 여행도 즐겨 다닌다. 자체 생산품을 판매하는 아미시 마켓을 독자적으로 열어 때마침 일고 있는 친환경 유기농 붐에 따라 큰 인기를 끌고도 있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그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를 전혀 사용치 않는다. 일상화되다시피 한 전자제품이며 자동차는 물론 전화나 컴퓨터도 아미시 마을엔 당연히 없다. 수돗물 대신 펌프를 사용하며 말은 그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자 요긴한 농사 도구다. 한가로이 사륜마차가 지나는 그 곁으로 우리처럼 외지에서 온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최대 속도감을 즐기며 질주하는 모터사이클까지 무법자처럼 굉음을 남기고 휑하니 사라진다. 그래도 그들은 전혀 동요되거나 위축됨이 없다.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하다.

 
보다 빠르고 보다 편리하고 보다 풍요로운 것이 지상 최고의 가치인 양 거기 길들여진 당신들 삶은 당신들의 것,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절제의 미덕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리라. 그러한 정신의 오만함이 희떠운 고집이나 어거지 오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 꼿꼿함이 도리어 부럽기만 하다. 점점 영혼이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 매 순간 휘둘리고 허물어지는 자신의 부질없는 갈등과 방황을 알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하여 발전되고 진화된 생활의 안락감이 행복지수와 정비례하진 않는 것임을 거듭 절감하게 된다.


광활한 평원의 석양을 배경으로 밭 둔덕 배구 코트에서 경기에 몰두하는 청소년들의 함성이 들린다. 여늬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휴대폰은커녕 그 흔해빠진 힙합바지 따위 그들 속에는 섞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자 점차 푸르게 젖어드는 이내 빛 속에 또 다른 장면이 전개되었다. 똑같은 차림을 한 일단의 처녀 애들이 마을 한가운데 고목 아래 모여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정녕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저녁기도 시간인 모양이다. 안개 신비로이 감도는 수도원 풍경이듯 저마다 살풋 고개 숙인 실루엣이 비감스럽도록 정결하다. 건너다보는 이 편은 혼탁한 俗, 갈래머리 따 내린 저 편은 청정한 聖.

순간 절로 떠오른 것이 그 옛날 유년의 삽화였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2004-                                                                                   


-진정한 크리스천의 용서-


아미쉬 빌리지에서 2006년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다. 우유배달하는 백인인 외지인이 이 마을 학교에 난입하여 어린아이들을 무차별 살상한 것. 학교를 몰래 빠져나온 한 아이가 죽자고 달려가서 신고를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아이들은 5명 사망에 5명은 중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범인의 총격에 여러 명의 어린이가 무고한 죽음을 당했으며 범인은 자살했다. 사망자 부모들은 죽은 백인남자의 황폐해진 정신을 가엷이 여기며 그를 용서한다고 말했다. 영화 '밀양'에서도 용서에 대해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나 정녕 쉽지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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