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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지나간 길목

by 무량화

갑작스레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하늘을 덮는 짙은 먹물.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빛처럼 금세 온 하늘이 시커메진다. 바람도 세차다. 숲은 메두사의 광란장 같다. 머리 풀어헤치고 이리저리 몸부림치는 나무들. 단풍나무 잎사귀가 마구 허공에 날린다. 푸른 야광빛 꼬리를 끌며 유영하던 반딧불이도 진작에 사라져 버렸다.


먼 데서 울리던 우렛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비 냄새가 느껴진다, 달궈진 대지의 메마른 흙이 젖는 내음이다. 메릴랜드를 건너 델라웨어를 가로지른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꽂는다. 폭우가 쏟아지자 동시에 요란스러운 천둥번개, 천지 가르며 기세 좋게 진격을 개시했다


어딘가가 무너져내리는, 아니 세상을 단번에 요절낼 듯한 굉음에 이은 번개. 정말이지 이곳에서 보는 번갯불은 그 위용이 엄청너 가공스럽다. 하늘을 쩍쩍 가르는 푸른빛 섬광 하도 대단해서 대륙적이란 표현이 절로 나온다. 지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두근두근 괜히 졸아드는 심장. 솔직히 기세 등등한 천둥번개가 겁나게 무섭. 두려움에 감히 사진 찍을 엄두도 못 내겠다. 하여.... 벤자민 프랭클린의 용기가 존경스러워진다. 유리창 가득 시퍼런 빛줄기 번쩍대고 귓청을 때리는 파열음이 가까운 데서 들린다. 번번이 느끼지만 비도, 번개도 참 어마무지하다 못해 가히 횡포스럽다.


미국에 닻을 내린 첫해, 한동안은 죽창처럼 쏟아붓는 폭우며 번개 치는 스케일 하도 대단해 그것조차 진기한 볼거리였다. 일삼다시피 창가에 붙어 서서 못 말리는 호기심 천국답게 숨죽인 채 지켜보곤 했다. 허리케인 직접 영향권도 아니기에 여파 정도였어도,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야말로 외경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장관이었다. 심하게 몰아치던 뇌우 잦아든 저녁, 어딘가로 비구름은 몰려가고 사위 고요해졌다. 폭풍전야만이 아니라 폭풍 지난 오후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 이번 샌디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뱅글뱅글 어지러이 도는 태풍의 눈이 무서운 속도로 바하마에서 올라오는 데도 원체 땅덩이가 크다 보니 며칠이나 걸린다. 그 사이 기세가 잦아들 법도 하련만 가공스런 파괴력은 별로 누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북상하는 도중 열대 고기압권이 찬 북극 기압골과 만나 가일층 기세등등해졌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자메이카와 쿠바에서 발생한 강력 허리케인 샌디의 소식들이 뉴스를 타고 연신 올라오고 있었으나, 지난주 내내 낙엽 날리는 뉴저지는 싯적일만큼 평온했다. 태풍전야라고 하듯 아주 조용한 가운데 하늘만 우중충 했는데, 기상예보대로 과연 어젯밤 늦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뉴저지 전역도 샌디 영향권 아래 들어갔다. 오전 들어 빗발이 차츰 거세지고 바람이 드높아지면서부터 음산하니 수상스런 조짐들이 슬슬 드러내고 있었다.


대서양 바다를 거슬러 오르며 전혀 기가 꺾이지 않은 폭군 허리케인이 무슨 심술이 났을까. 느닷없이 뉴저지 쪽에서부터 내륙 방향으로 기선을 바꾸기 시작,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이 직각으로 꺾이는 뉴스 화면이 속보로 계속 뜨기 시작했다. 여지껏은 한번도 정통으로 겪어보지 않은 허리케인의 진면목을, 유감스럽게도 샌디로 인해 이번엔 만나게 될 모양이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동부 전 지역, 뉴저지 역시 대중교통 서비스가 중단되 필라델피아와 이어지는 지하철과 버스 및 철도 운항이 멈췄으며 샌디는 하늘길도 가로 막았다. 에어프랑스 등 유럽 항공사는 오늘내일 예정된 뉴욕, 볼티모어,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쪽으로 오는 국제항공편을 줄줄이 취소했다. 미국 동부해안을 왕래하는 국내 항공편도 모두 취소됐다. 이처럼 공항이 폐쇄되고 학생들은 전면 휴교, 대부분의 회사들은 재택근무를 명했으며 주민들도 되도록 집에서 머물라는 붉은 자막글씨가 연신 화면에 떴다. 뉴스를 보니 초강력 태풍인 샌디는 '프랑켄스톰' '슈퍼스톰' '매머드 스톰' '괴물 허리케인'으로 표현될 만큼 위력 대단하다고 하였다. 기상 당국도 이번 허리케인이 엄청난 폭우와 돌풍을 몰고 오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샌디가 육지로 올라오는 시점이 바닷물이 높아지는 만조와 겹치면서 피해를 키울 것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도박장으로 불야성을 이루던 아랫동네 아틀랜틱 시티는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일부 주민대피령을 내렸다. 시시각각 보도되는 뉴스 화면을 보니 방파제를 넘은 바닷물이 모래사장을 거의 다 덮다시피 해 잔교가 흔들흔들 위태로운 데다 해변 펜스들은 죄다 날아갔다. 강한 태풍으로 인한 유리 파손을 막으려고 어제 내내 카지노장마다 나무판자로 유리문에 덧대기 작업을 했다 한다. 상대적으로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우리 동네는 해일 우려는 전혀 없으나 워낙 많은 수목들이 문제, 태풍이 몰아칠 때 가해 주범으로 대두되었다, 거의가 집채보다 키가 크고 우람한 거목들이라 이게 쓰러지면서 전선을 건드려 대규모 정전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더러는 가옥으로 쓰러지며 지붕을 부셔 뜨리기도 하는 등 피해를 속출시키기 때문이다. 앞뒤로 큼직한 단풍나무가 서있는 우리도 오늘밤은 이층 침실을 비우고 지하실로 대피해 잠을 청할까 고려 중이다. 허리케인이 우리 동네를 통과하는 시각은 새벽 2시, 깊은 밤 시간대라 아무래도 편한 밤이 되기는 글렀지 싶다.

또 다른 허리케인 여파라면 사재기를 들 수 있겠다. 지난주 주말인 금요일부터 시작된 사재기 열풍은 거의 난리 수준이었다. 태풍 후유증에 대비해 기본 의약품과 생활필수품을 준비하느라 슈퍼마켓마다 물과 빵, 건전지와 양초 등은 동이 났으며 주유소는 휘발유를 가득 채우려는 차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런 날이 길어봐야 2~3일간 일 텐데 너도나도 위기의식에 휩싸이는 바람에 가게마다 재고처리는 확실히 되었을 터다. 유난 떠는 미국사람들 호들갑 어디 가 겠나? 하면서 뒷짐만 쥐고 있던 우리도 이웃들의 채근대로 생수와 우유, 간식거리와 고구마를 넉넉히 여분으로 사다 놨다. 다른 준비는 진작에 미리미리 안팎으로 해뒀다. 뒤뜰에 말리던 시래기도 거두어들이고 하다못해 야드용 쓰레기통까지 강풍에 날아갈까 싶어 그라지에 들여다 놨으며 집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와 농기구 등속도 야물게 챙겨놓았다.

주정부는 폭풍으로 도로에 나무 등이 쓰러질 경우에 대비, 장애물 제거와 도로 정비를 위해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또한 24시간 응급비상체제를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이렇듯 심상찮은 기류를 형성하는 주변 분위기가 더욱더 불안감을 키우며 기분을 움추러들게 하였다. 그러나 유비무환,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인구밀도가 높은 뉴욕은 한층 더 야단들.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 중단에 뉴욕증권거래소는 월요일 거래만 계속하되 객장은 폐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동부 해안에 있는 주요 정유시설도 가동을 멈췄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이래저래 시름을 더하게 하는 샌디다. 샌디가 미칠 파급 효과는 경제적인 손실까지 합쳐 2005년 뉴올리언스를 초토화시킨 카트리나에 비견할만하다니 말이다. 지금 샌디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수도 워싱턴. DC를 비롯해 뉴욕시뿐인가. 펜실베이니아주, 메릴랜드주, 버지니아주 등 미 동부 모든 주는 일제히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태풍의 핵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샌디님, 모쪼록 부디 조용히 평화롭게 지나가시길, 2012


샌디가 뉴저지 외곽을 휩쓸고 지난 다음날 오후 노을빛이외다.


이제 비행기는 자재로이 다니나 아직 이곳은 도로 소통이 원할치 못한 곳이 많소이다.

거목들이 벌러덩 나자빠져 길 한가운데 드러누운 까닭이라 하더이다.


우리집을 비롯 인근에 사는 지인들은 허리케인이 지나갈 때까지 근 열흘간 불편을 참아야 했으나 크게 놀란 외엔 별로 피해랄 것도 없었소이다.


태풍으로 나뭇가지가 부러진다거나 나무둥치가 넘어지며 전선을 치는 바람에 정전사태로 이삼일 곤란을 겪은 정도.


헌데 이에 반해 가까운 아틀랜틱 시티 전역과 뉴욕 중심부가 심각한 재해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소이다..


서부의 라스베가스에 비견되는 곳, 사철 도박장의 휘황한 불빛이 넘쳐나던 AC 시가는 완전 초토화되었다 하오.


바닷가와 인접한 그곳을 직통으로 허리케인이 관통했으니....


공교롭게도 태풍의 핵이 육지로 경로를 바꾸는 길목이 바로 거기였다 하오.


때마침 만조 때라 바닷물이 엄청나게 역류해 시가지를 모래와 해수로 뒤덮어버렸다 하더이다.


동부인들의 휴양지 겸 위락 장소이기도 한, 그러니 우리에겐 별로 해당사항 없는 이역.


트럼프타워니 타지마할이니 별유천지 같은 외관부터 화려하고도 거대한 카지노장이 당분간 개장을 못한다고 하오.


세계 제1의 도시 뉴욕은 정말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다고 하더이다.


뉴스 보도나 사진으로 익히 보아왔듯이 어찌 그리 최고라는 명색 무색토록 속수무책 당하고 마는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맨해튼 저지대가 침수되며 피해액이 무려 70조억이나 발생했다니.


어마어마한 자연재해 앞에 보잘것없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아무리 과학과 물질문명이 뛰어난 들 하느님의 권능 앞에 무력하디 무력한, 작디작은 존재일 뿐인 인간.


오만 부리지 말고 겸손하라, 재차 일깨우십디다.


뿐이리까.


자연을 함부로 오용한 죄, 그대로 그대들에게 되갚음되나니!


준엄하게 경고하십디다.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줘야 할 지구,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환경문제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싶으더이다.


허리케인은 마야인들의 우라칸, 즉 하늘의 신에서 유래한 말이라 하외다.


그러나 이제 허리케인은 하늘의 신이 관장하는 게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물.


무분별한 온실가스 배출에 따라 지구가 따뜻해질수록 더 무서운 허리케인이 올 수 있다 하더이다.


더 이상 자연을 성나지 않게 다독이며 자원을 헤프지 않게 쓰는 것이 우리 몫 아니리까.


그리스 델포이 신탁장 입구에 '오만하지 마라'라 씌어있다고 하더이다


이것은 신 또는 자연이 주는 영원한 경고 아니리까.


천지 창조 여섯째 날 제일 마지막에 인간을 만든 이유는, 모든 자연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였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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