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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0. 2024

연극, 치마 돌격대 배경인 화북포구

환해장성을 아시나요?


옆집 동료 교사가 며칠 전 연극표 넉 장을 예매해 뒀다고 하였다.

를 공부한다는 그녀는 고맙게도 그때 내 표까지 챙겼다.

듣기도 첨인 치마 돌격대란 제목만 듣고는 행주산성 전투를 상상하는 정도가 내 앎의 수준이자 한계였다.

별 기대를 걸지 않았기에 사전 검색도 하지 않고 엊그제 저녁 공연장으로 향했다.

서귀포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 축하 공연을 가진 <치마 돌격대>는 '제41회 대한민국 연극제 제주'가 펼친 무대였다.

심드렁했던 처음과는 달리 극 초반부터 흡인력 있는 연극 무대에 완벽히 그리고 오롯이 빠져들었다.

탄탄한 각본에 따른 연극은 갈수록 높은 몰입도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변방의 섬에 사는 제주민들의 고단하고 힘든 삶의 흔적들이 대사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고려 시대부터 끊임없이 외적으로부터 약탈당하는 등 수난을 겪은 제주인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다.

섬은 안팎으로 시달렸으니, 조정에서는 특산물인 전복이며 귤 공납을 독려했고 진상품인 군마 조달 책임도 지고 있는 제주였다.



연극은 투명한 푸른 천으로 표현한 바닷물 속에서 물질하는 해녀로 무대를 열었다.

착취당하며 소외된 섬주민으로 살아온 한 서린 그들의 푸념이 이어지는 도중, 불길한 주홍빛 번갯불이 번쩍였다.

파발마가 외친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그들은 혼비백산 도망쳐버린다.

그랬던 지역민들이 어차피 막다른 길, 마지막 용기로 끝까지 죽을힘 다해 싸우겠노라 결사항쟁의 뜻을 다진다.   

화북포로 개미떼처럼 밀고 들어온 왜구들과 주민들은 제주목을 둘러싸고 3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적들은 조선 조정이 제주를 도외시하여 목사 파견 시에도 무능하고 부패한 탐관오리나 보낸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제주로 부임한 목사 김수문은 그러나 전혀 달랐으니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일생일대의 최대 위기를 맞은 제주민들을 독려해 한 덩어리로 뭉쳐 싸우자며 목사가 자진해서 선봉에 섰다.

하나가 된 민관군은 목사를 비롯하여 정예군 70명과 치마(馳馬) 돌격대가 합심단결해서 마침내 크나큰 시련을 이겨냈다.

연극은 배역에 걸맞은 캐스팅으로 무게감을 살렸으며 이방 역을 맡은 원로 배우 최종원의 감초 연기는 재미를 선사했다.

대규모로 벌어진 격렬한 전투 장면과 기마부대의 활약상을 연극은 첨단 기술과 형식을 빌려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한정된 공간을 3차원으로 확장시켜 무대를 입체적으로 바꾸는 영상 연출인 프로젝션 맵핑 기술도 돋보였다.

춤이라는 몸짓으로 표현된 역동적인 말 퍼포먼스 역시 무척 신선했다.



규슈에 기반을 둔 왜구 떼가 선박 70여 척에 나눠 타고 영암 장흥에서 분탕질 치다가 여의치 않자 제주를 침공했던 1555년.  

주로 전라도 해안지방이 왜구의 약탈 대상이었고 석벽으로 둘러싸인 제주인 데다 환해장성이 가로막아 쉽게 침입하지 못했던 섬.

그런 점에서 이번은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왜구 침입이었던 셈이다.

태종의 대마도 정벌 후 근 백여 년간 잠잠하던 왜구가 조선의 군사력 약화를 틈타 발호하기 시작했던 것과도 맞물렸다.

여러모로 외딴섬 제주가 위태롭다는 판단하에 조정에서는 여진족 방어에 공이 뛰어난 장수 김수문을 제주 목사로 임명했다.

조선 명종(명종 10년) 때인 그해 유월, 제주목사의 급한 장계가 올라왔다.

"이달 21일에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로 와 1리 가량의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습니다."

왜구들이 조선시대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북포구로 병사 천여 명을 이끌고 새카맣게 몰려들었던 것.

화북포구는 제주성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는 바닷가다.

적들은 포구에서 거로마을과 사라봉 일대를 거쳐 제주읍성 동쪽의 높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제주성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제주성을 점령, 왜구들의 본거지로 삼고자 노린 것이다.

큰 야심을 품고 쳐들어온 왜구들은 그러나 목사를 주축으로 한 치마 돌격대와 70인의 효용군에 의해 결국 격퇴됐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부터 1554년까지 그간 총 열두 차례나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제주섬은 왜구 침입이 잦던 곳이다.

고려 말부터 을묘왜변시까지의 250년간 왜구 침입이 40여 차례나 있었다고 고려사에 나와있을 정도다.

 

당시 제주를 침략한 왜구에 맞서 민관군이 힘을 하나로 모아 접전 끝에 격퇴시키므로 승전의 새 역사를 써 내린 제주인들.

1555년 7월 6일, 다시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를 보내왔다.

"6월 27일 무려 천인의 왜적들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병이 매우 많았는데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해 적군은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투구(紅毛頭具)를 쓴 왜장이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는 명종실록 6월 28일 기록이다.

김상헌의 남사록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그 사실이 자세히 나와있다.

을묘왜변으로 기록된 이 전투는, 목사 김수문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왜구 천여 명을 상대로 싸워 이긴 역사적 쾌거였다.

죽음 각오하고 자원한 소수 정예병 치마 돌격대(馳馬突擊隊)는 4인의 기마대를 이름이다.

치마는 한자로 馳 달릴 치  馬 말 마, 즉 말 타고 달리며 싸우는 기마 특공대다.

치밀한 전략을 세워 선제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왜구들을 물리친 김수문 목사.

왜변 이듬해 그는, 전공(戰功)에 대한 명종의 배려에 보답하고자 목관아 안쪽에 가장 높은 건물인 망경루를 건립했다.

어느 날, 화북포구 창창한 물길을 휘덮다시피 몰려든 왜구 떼.

연극 속의 장면을 상상하다가 잠이 드니 꿈길에조차 바닷물이 출렁댔다.

이튿날 급기야 망경루가 있고 성터가 있고 화북포구가 있는 제주시로 달려갔다.




화북포구, 처음으로 와본 곳이다.

차도에서 한참 걸어 들어와 화북진성을 끼고 포구마을로 들어섰다.

제주 해안가 치고 이리 한적한 바닷가도 있다는 게 심지어 신기할 지경이었다.

관광섬이 된 이제, 한갓진 어촌도 파도 소리 벗 삼아 조용히 살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 세태다.

사업성 괜찮은 마을이다 싶으면 용케 들 들쑤셔서 핫플 만들어내니까.

해변마다 카페와 식당들 깔려있게 마련인데 여긴 예외지대였다.

화북포 앞바다 오가는 배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용왕께 빌던 해신사도 그대로다.

나지막 돌담 둘러친 어촌에서 바뀐 거라곤 아마도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변했다는 거?

그래도 살림은 꽤 옹골져 보인다.

선주가 많은 듯 고기잡이배가 여러 척 포구에 묶여있다.

방파제로 나갔다.

망망대해가 끝 모르게 펼쳐졌다.

상쾌하다기보다 어쩐지 느낌 처연해진다.

넓고도 먼 수평선, 창망함이 밀려든다.

무한정 펼쳐진 바다는 기막히게 푸르기도 하다.

아예 검푸르다는 표현이 맞겠다.

막막한 그 바다에 굼실대는 파도조차 숨죽인 듯 고요하다.


화북 앞바다 창망(滄茫) 하기 그지없었다.




아득한 저 멀리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왜구의 깃발.

그 거리 좁혀질수록  별도연대 지키며 연기 피워 올리던 경계병은 긴장으로 침이 말랐으리.

제주섬 해안을 빙 둘러 감싼 환해장성 바윗돌마저도 바짝 귀 세운 채 정면만을 주시하고 있었으리라.

빠르게 전열 가다듬으며 경계태세에 돌입한 군졸들.

웅성대는 해안마을, 아녀자들 벌써 피난 보따리 꾸릴 것이다.

둥둥! 제주성에서 북소리 높아진다.

여진족을 소탕한 김수문 목사는 뛰어난 전략가다.

휘하에는 목숨 내건 치마 돌격대와 용감스러운 70명의 정예병이 포진했다.

포구에 도착한 지 반나절 만에 제주성에 닿은 적들은 진을 치고 성곽을 포위한 채 공격해 들어왔다.

성안의 목사 이하 관군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적은 물러나 대오 가다듬은 후 다시 침공 거듭하며 사흘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일전불사의 강한 결전의지에 따라 방어에만 급급하지 않고 목사는 과감히 선제공격에 들어간다.

불퇴전의 정신으로 하나 된 군관민,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맞서 싸울 각오다.

총기로 무장한 거침없는 왜구 떼 제주성 향해 다시 새카맣게 몰려온다.

타다당! 철환이라 알려진 총기가 불을 뿜었다.

도저히 화살로는 막을 수 없는 화포 공격에 주춤한 성내, 이때 적진 속으로 돌격하는 치마 부대.

조자룡이 창 쓰듯 마구 칼 휘두르며 백병전에 나선 날쌘 기마대는 말발굽으로 왜구를 짓이겨댔다.

총기 위세만 믿고 들입다 달겨들던 적들은 혼비백산, 퇴각했다.

와와! 성 안팎에서 크게 일렁이는 함성.

을묘왜변은 제주에서 그렇게 마무리됐다.

역사에 기술된 을묘년 왜구 침략, 당시 전라도 여러 지방이 유린당하며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이 왜변은, 전국을 통일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 침공이란 야욕에 불을 댕기는 단초 역할을 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내 땅을 지켜 승리의 항쟁사를 쓴 제주민의 결기를 조정에서 깊이 새겨봤더라면?

을묘왜변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으로 왜군은 제주를 비껴갔으니, 기나긴 임란의 와중 제주가 피해 전혀 입지 않았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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