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r 20. 2024

엔세나다에서의 한나절

바하멕시코

멋진 선물을 안겨준 엔세나다를 주저없이 금번 크루즈 여행의 백미로 꼽겠다.

라 부파도라(La Bufadora) 바다분수에 이르러 비로소 두팔 높이 흔들며 들뜬 마음으로 환호할 수 있었으니까.

고래가 숨쉬듯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의 장관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속이 다 시원하게 뻥 뚫리며 새처럼 가벼운 심사되어 날아갈듯 흔쾌하고도 상쾌한 기분이 되었으니까.

청청하게 짙푸른 하늘엔 눈부신 태양, 전망 탁트인 태평양이 잘 다듬어 놓은 해안선은 수려했으며, 투명한 청옥빛 물결은 해벽에 부딪혀 거듭거듭 하얀 물보라로 산화하곤 했다. 이렇듯 최상의 날씨와 풍광을 선사해준 엔세나다에 감사!  



짜릿한 카지노도, 흥겨운 가무도, 부페나 양식도 즐기지 않는 터라, 크루즈여행 자체가 과히 땡기지 않아 여태 망서렸었다.

마침 언니가 캘리 온 김에 크루즈 여행이 내게 맞는지 시험삼아 한번, 가격대도 적당해 4박5일 바하멕시코 크루즈에 합류했다.  

오션뷰로 캐빈을 잡았지만 전망 좋은 방이랄 것도 없는 것이 밤낮으로 검푸르게 굼실거리는 파도만 보일 뿐이었다.

롱비치항을 떠날때 잠시 창밖을 내다봤고 카타리나와 엔세나다에 도착하며 창가에서 낯선 풍경을 지켜봤던 게 고작.

배를 탄 며칠간 내리 기상상태가 별로라서, 원유처럼 시커멓게 보이는 바다가 솔직히 두렵기까지 했으니 오션뷰의 특혜란 걸 제대로 누릴 정황이 아니었다.



카타리나에서의 실망으로 엔세나다 역시 별 기대는 안하고 밤새 선잠을 자다깨다 하다가 멕시코에 닿았다.

일단 엔세나다에서 하선하니 날씨는 끝내주게 쾌청했다. 시간 배정까지 하루 온종일 머물다시피하게 넉넉히 허용되었다.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엔세나다는 남가주와 인접해 있는 위치상의 잇점으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비롯 어패류 가격대가 낮아 한인들이 이웃가게 드나들듯 가벼이 오가는 곳.

내 경우 초행이지만 바짝 호기심 동하게 하는 액티비티 상품도 없고, 비린내 나는 해산물 시장도 원치 않고, 멕시코 음식기행을 할 것도 아니라서 시내관광은 접고 곧장 택시를 불러서 라 부파도라로 향했다.

'뿜어내다'라는 스패니시 동사 부파르(bufar)에서 파생된 '물이 뿜어나오는 곳'이라는 라 부파도라까지는 멕시코의 전형적인 시골마을과 허름한 산동네로 해서 비포장길을 삼십여분 정도 달렸다.

경작지로 쓰이기엔 영 척박해 보이는 토질과는 달리 우측편에 따르는 잔잔한 연안은 튜나 양식에 알맞아 여기저기 하얀 동그라미 부표가 선연히 떠있었다.



주차장에 내리면서부터 분위기는 왁자지껄, 주위엔 관광객이 숱해 상가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복잡하도록 무리져 밀려들 내려갔다.

기념품 가게마다 판쵸와 민속의상인 폭넓은 치마가 펄럭거리고 스타일 다른 해먹 흔들거렸는데 대체로 가격은 저렴했다.

멕시코 토산품들은 태양빛이 강렬해서인지 유달리 울긋불긋 원색적인가 하면, 희한하게도 해골 모형을 한 장식품이 주종을 이루다시피 하는데 그들 설명으로는 해골이 부활을 상징한다나.

상점 안에서는 멕시코의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챙 너른 밀짚모자 '솜브레로'를 만들거나 색색으로 실팔찌를 엮는 손놀림이 분주했으며 장바닥엔 식당 호객꾼들 발걸음이 바빴다.  



한참 이어지던 상가가 끝나자 깃털장식 화려한 원주민 하나가 창창한 바다를 배경삼아 피리를 불며 춤을 추어댔다.

조개피에 그림을 그리거나 바이얼린을 켜는 길거리 악사며, 벽에 기대 기타를 튕기는 멕시컨 아저씨도 눈에 들어왔다.

그 뒤켠에 사람들이 바다를 내려다보느라 죽 둘러서 있었고 연방 사진을 찍어가며 발해지는 경이에 찬 탄성도 들렸다.

자리를 뜰 줄 모르는 구경꾼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엔세나다 유일한 관광자원인 바다분수가 기운차게 솟구쳐 올랐다.

옐로스톤의 가이저처럼 장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조류에 따라 강하고 약한 리듬을 타는 그나름의 매력을 지닌 라 부파도라였다.

먼바다에서부터 채곡채곡 압축시킨 파도 에너지가 엄청난 폭발력으로 시원스레 분출하며 사방에다 물안개를 뿌려댔다.

이 자연현상 하나가 뭇 사람들을 부르는 관광상품되어 엔세나다를 먹여살리는구나 싶으니,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진도 앞바다나 장보고의 뱃길도 잘만 홍보 개발하면 얼마든지 지자체의 주요 관광자원이 될듯....



한참을 밍기적거리며 주변에서 맴돌도록 발길 부여잡던 바다분수를 아쉬운채 뒤로 했다.

상가를 되짚어 돌아오며 모처럼 무더운 날씨라 카페에 들러 맥주와 부리또를 주문했다.

멕시코에 왔으니 마가리따나 데낄라도 생각났지만 벌건 대낮부터 세 아녀자가 마시기 무리없기로는 아무래도 맥주였다.

단숨에 병을 비우고 일어나 우릴 기다리는 택시에 오르기 전 구멍가게에 들러 멕시코산 흑맥주를 사서 귀가길에 물 대신 마셨다.

싸하면서도 묵직한 맛은 꽤 그럴싸했으며 오후 햇살에 달궈진 대지는 나른히 늘어져 있었다.

배에 들어와 멕시코 부둣가를 내려다보니 방파제 곳곳에 물개인지 바다사자인지가 무더기로 뒹굴며 볕바라기하는 중이었다.

멕시코 역시도 바람직스런 체제로 정국만 잘 이끌어나간다면 오늘의 남루와 초라함을 벗고 힘차게 도약할 수 있을만큼 저력을 지닌 나라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베네수엘라 등등의 중남미 국가 대부분이 좌경화로 홍역을 치루는 바람에 경제가 추락했지만, 드넓은 땅에 부러운 자원과 온화한 자연환경이라는 천혜의 인프라를 잘 활용한다면 다시 풍요로운 나라로 성장하리라.

저간의 세상사야 어찌 돌아가건 맥시코의 한 귀퉁이 작은 항구도시 엔세나다엔 늦도록 태양이 가득했다.

작가의 이전글 섶섬이 사라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