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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물 들였어요
by
무량화
Sep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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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유년기 때.
엄마는 앞마당 화단에 일년초를 예쁘게 가꿨다.
채송화 금송화 분꽃 봉숭아 백일홍 달맞이꽃 해바라기...
나팔꽃 풍선초 수세미꽃 여주꽃은 담장을 타고 부지런히 올라갔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해마다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봉숭아물을 들였다.
여학교 다니며부터는 손톱에 치장을 할 수가 없게 됐다.
그 후 오래 봉숭아 꽃물을 잊고 살았다.
마흔 즈음 <어머니의 겨울>이란 글에 봉숭아 얘기가 처음 등장했다.
1989년도에 쓴 그 글 내용은,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게 된 사연이 담겨있다.
그로부터 무려
35년 만에 다시 봉숭아물을 들였다.
엊그제 길가 풀섶에 무더기 져 피어난 봉숭아 꽃을 보자 마음이 동하길래 약간 뜯어왔다.
마침 치자물 염색을 들이느라 사놓은 백반이 있어서 봉숭아 재료를 찧을 때 적당히 넣었다.
손톱 위에 찧어둔 봉숭아를 얹은 다음
,
전에 본 기억대로 일머리를 잡았다.
먼저
아주까리 잎 대용으로
일회용 장갑 손가락 부분만
잘라놓았다.
그 걸 조심스레 씌운 후 거즈로 감싸준 뒤 반창고로 칭칭 감아줘야 하는 과정은 혼자서 하긴 어렵다.
옆집 현주씨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현직 교사인 그녀라 봉숭아 물들이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자기도 들여야겠단다.
일단 나부터 들여보고 곱게 잘 되면 다음날 그녀도 들이기로 했다.
어려서는 봉숭아 물 들일 때면, 밤새 동여맨 손톱 싸개가 빠져 이부자리 후지를
까 봐 잠을 설치곤 했다.
당시는 보드라운
콩잎이나
아주까리 잎으로 먼저 감싼 뒤 헝겊
쪼가리로 싸매서 질긴 삼베 실로 여러 번 돌려 꼭꼭 쩌매 줬는 데도 말이다
그래선지 거북스럽고 불편한 데다 손끝도 욱신댔는데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말단 감각까지 둔해진 건가 싶어 기분이 좀...
한창 자라느라 활동량 넘쳐나던 어린 시절과 달리 나이 겹쳐질수록 잠버릇도 고요해지고 감촉 무뎌지는 게 당연.
아침 눈 뜨자마자 봉숭아 물들인 손톱부터 풀어봤다.
짜잔~ 너무 짙지도 연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색상으로 물든 손톱을 본 현주씨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봉숭아 빻아둔 게 넉넉해 자신은 물론 동료 교사 중 희망자에게 나눠주겠다며 남은 재료를 갖고 갔다.
그믐달 서늘하게 떠있던 간밤, 봉숭아꽃이 손톱을 아주 곱게 물들여줬다.
봉숭아 꽃물 들이면 저승길이 밝아진다는 옛말까지, 나이 탓인지 동시에 상기됐다.
이렇게 또 하나 제주에서의
빛 고운 추억이 쟁여진 지난밤이다.
열대야로
후덥지근하던 밤, 그믐달은 소멸로 향하고 있으나 거기에 난 붉은
봉숭아 물로
오달지게 방점 찍어놨다.
벽공 높이서 하얗게 빛나는, 그러나 곧 사라질 듯 존재 희미한 달이지만 처연하거나 비장하지 않은 그믐달로 그렇게 각인시켜 뒀다.
더불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여름마다 봉숭아물을 들이기로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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