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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가 패스의 청보석 타나야 호수
by
무량화
Sep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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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결 가다듬는 한 해의 끄트머리 달 매듭달.
간밤 만월을 앞둔 은빛 달 벽공에 홀로 밝더니 아침 하늘 창창히 푸르러 마치 깊은 호수 같다.
그러고 보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무렵 산간 호수 물빛은 얼마나 시립고 차가울까.
겨울 들머리인 지금쯤은 아마 날카로운 암봉마다 눈 하얗게 쌓였을 테고 설한풍 골짜기 타고 내려와 호수는 결빙되었으리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직한 화강암 봉우리들이 호수에 얼비치며 빚어내는 절경으로 요세미티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호수가 생각난다,
숲과 호수 조화로이 어우러진 요세미티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산정호수 타나야의 물빛이 문득 떠오른다.
해발 8,150 feet에 위치한 테나야 호수는 티오가 패스 도로 바로 가까이 붙어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산세 장엄한 요세미티 고원지대에 자리 잡은 테나야 호수는 빙하 녹아내린 물빛 투명히 맑고 짙푸르다.
테나야 호수를 원주민들이 '빛나는 바위의 호수'라 불렀던 대로 잘생긴 바위산 반영이 호심에 하얀빛으로 잠겨있다.
침엽수 숲이 있는가 하면 호숫가 모래밭 너르며 호심 깊어 배 띄우고 신선놀음도 즐길 수 있는 호수다.
한두 시간 여유 넉넉하다면 호수 한 바퀴 돌아보는 하이킹 맛도 유다를 것이다.
물론 여름엔 수영이나 카약을 타기도 하고 근처에서 암벽등반을 할 수 있으며 트레일 코스도 여러 갈래 열려있다.
진지에 늘어선 깃봉처럼 암봉 예리한 데다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매끈히 흘러내린 화강암반이 도처에 깔린 요세미티,
그 품섶에는 장신의 폭포와 명경 같은 호수가 3백여 개나 비밀스레 간직되어 있다.
언젠가 비숍 사우스 레익에서 좌측 숲으로 접어들었더니 비탈진 삼거리에 선 안내판이 JMT 길임을 귀띔해 줬다.
우연찮게 그 이름난 트레킹 일부 구간을 걷게 되었는데 능선 하나 넘으면 눈부신 호수 산모롱이 돌면 또 짙푸른 호수.
청옥 목걸이 풀어 흩뿌린 듯 호수 연달아 이어지며 빚어내는 신비로운 정경은 어떤 헌사마저 빛을 잃을 정도였다.
수수만년 전 바다에서 융기한 시에라네바다, 서쪽은 완만한 고원 펼쳐졌고 동쪽에는 험준한 산맥 길게 자리 잡았다.
이어서 백만 년 전쯤에 쌓인 눈과 얼음이 빙하를 이뤄 흘러내리며 독특한 氷河 지형(glaciated. topography)을 만들었다.
그렇게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빼어난 화강암 절경지가 요세미티다.
시간 거슬러 상기도 푸르게 기억되는 그 장소가 새삼 떠오른 이유는 이러하다.
손자를 기숙사에 데려다 주려 지난 9월 북가주로 가다 잠시 들린 티오가 패스의 청보석 테나야 호수에서다.
새로이 펼쳐질 대학생활의 기대로 들떠 있던 아이는 춥다면서도 청청한 물빛 아름다운 호숫가를 떠날 줄 몰랐다.
코끝 싸한 날씨건만 물가에서 물수제비도 뜨고, 기어이 피크닉 에어리어에 앉아 군것질거리를 챙겨 먹던 아이인데
추수감사절에 다니러 온 손자는 그새 아이 티를 완전 벗고 부쩍 커있었다.
몇 달 상관에 일어난 신기한 변화가 그저 놀라웠다.
공부보다 컴 게임에 매달린다고 지청구도 어지간히 듣고 등짝을 맞기도 한 아이다.
그 등짝이 듬직하고 늠름하게 넓어지고 강건해졌다. 그저 대견스러워 자꾸 등을 토닥이게 된다.
입이 짧아 끼니때마다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기숙사에선 뭘 어찌 먹었는지 체중도 늘고 야물딱져 보여 흐뭇했다.
무엇보다 철이 부쩍 들었다.
말씨도 달라지고 행동도 어른스러워졌다.
화상 통화로 얘기 나누는 부자간을 지켜보는데, 남실남실 가슴에 차오르는 따스한 물살은 행복감이었으리.
손자는 여러모로 '박 씨'보다 '구 씨' 성향을 더 많이 닮았다는 딸내미 표현대로 체질이며 습성이 나와 비슷하다.
반면 오차 없는 핏줄기의 정직성이 외경스럽다 못해 괘씸할 정도로, 딸내미는 체구 외에는 거의 모두 요셉을 닮았다.
체질과 손 발 골격은 물론 걸음걸이마저 빼어 꽂은 판박이다.
아들은 먹는 것과는 달리 항상 슬림한 체형에다 성격과 취향까지도 내 쪽을 거의 닮았으니 그 유전인자가 어디를 가랴.
자식이 어버이를 닮는 것은 형질의 유전에 의해서이니 손자는 또 제 아빠를 닮았고.
생물학적 존재인 개체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자신의 분신인 자손에 의해 기본 형질은 영원으로 어어지게 된다.
자손에게로 전해지는 생명의 핵, 그렇게 우리는 삶의 유한성을 극복한다.
그래서일까, 드러내놓고 표현은 안 하지만 내게 있어 손자는 누구보다 의미가 각별하다.
나는 조금씩 쇠해가고 있지만 손자의 생명을 통해 내 존재가 영속적으로 이어짐을 확인하는 안도감.
아득한 조상신과 먼 후대를 잇는 징검다리의 소임을 완수했다는 뿌듯함은 감격이기도 하다.
누리 만년 묵연히 풍상의 일월 지켜본 요세미티 암봉 아래 테나야 호반은 이제 단단히 얼어붙기 시작할 것이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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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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