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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줘, Lyell Canyon
by
무량화
Sep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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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이고 다시 찾아가 물소리 들으며 호젓하게 쉬다 오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요세미티에서 비숍으로 넘어오는 120번 길목, 테나야 호숫가에서 일단 쉼표를 찍고 잠시 멈췄어요.
강바람 쐬며 심호흡도 하고 건너다 보이는 잘 생긴 바위산인 스테이틀리 플레져 돔을 배경으로 한 호수도 눈높이와 각도 다르게 몇 장 담아보았구요.
다시 차를 몰아 산길 휘돌면서 불현듯 솟은 화강암 돔과 크고 작은 호수와 연둣빛 초원을 휙휙 스쳐 지났지요.
트왈로미 매도우에 이르러 트레일 걷고자 준비하고는 Lyell Canyon 쪽 길로 들어섰지요.
홀로 JMT 머나먼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젊은 여성도 만났고, 묵직한 배낭 멘 장년의 하이커 두엇 도 스쳤습니다.
길가에는 엉겅퀴꽃 별똥별꽃 컬럼바인 등 들꽃 뒤섞여 조촐하나 생기 찬 야생화 축제를 펼치고 있더군요.
부드러운 초지 낀 평지 길을 1마일쯤 걷자 하이 시에라 캠프장이 오른쪽으로 너르게 열려 있었구요.
식구들하고 캠핑하러 와야지 내심 작정하며, 위치 단디 찜해놓으려 도중에 서있는 이정표마다 사진에 담아두었습니다.
고려장 하러 가는 아들 지게 위에서 솔가지 꺾어 아들 돌아갈 길 표시해 놓던 노모처럼요,
내 꼭 다시 오마, 그 자리에서 야물딱지게 새끼손가락 걸고 내심 엄지로 도장도 꾹 찍었지요.
높다라니 청청한 소나무가 그늘 이뤄 시원한 흙길을 설렁설렁 걸어갔습니다.
걷기 좋은 평평한 솔숲 길이라 나무 향기도 바람 맛도 물소리도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산속 저 멀리까지 걸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돌아갈 길 셈해서 캐년 들머리 적당한 물가에 자리 잡았지요.
널펀펀한 바위가 멍석처럼 주욱 깔린 시냇가 나뭇그늘에 앉아있으니 무릉도원 신선 따로 없더군요.
그러나 너르디 넓은 암반 이리 판판해지기까지는, 무량 세월토록 부딪는 물줄기로 살점 아프게 깎였겠지요.
시선 어디에 두던 근방 전경은 마치 시간 멈춘 고대의 숲처럼 적요롭고 평화로웠어요.
고르게 다듬어진 반석 위로 옥류가 소곤거리듯 여울지며 너르게 흘러갔습니다.
심신 차분해지며 세로토닌이 샘물처럼 솟아 서서히 가슴께로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득, 세상일 잊고 Rip Van Winkle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꽃송이 피어나듯 오감 저절로 열리며 자연과 합일되는 순간, 숲소리 외에 사위는 고요로 가득 찼지요.
유유자적 물외한인 되어, 아니 그냥 바위 되어 거기 그렇게 붙박이고만 싶었습니다.
그런 기분 참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간 설악산 천불동에서 첨으로 느낀 감회였고, 85년 지리산 청학동에서도 그리 생각했었지요.
지리산을 다녀와 남긴 기행문 중에 당시 회포를 이리 적어둔 글이 있더군요.
'흐르는 바람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자유로운 혼으로 살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무정(無情)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산꼭대기 뿌리 깊은 소나무이고 싶었다. 이냥 한 방울 이슬로 잦아들고도 싶었다.
아아, 바위 곁에 굳어진 또 하나의 바위이고 싶으며 청류에 하얗게 씻긴 조약돌이고 싶구나.
이름 모를 산새여도 좋을 것 같애. 그늘에 묻힌 조그만 들풀이어도 행복할 것 같애.
시간도 형체도 시나브로 녹아져 여기 이대로 영원히 정지해 머물고 싶구나.'
저만치 앉아 등만 보이던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 데리고 와 릴낚시 하며 시간을 낚고 있더군요.
휘도는 물굽이 짬이라 그래도 수심이 있어 고기 노니는가 아이는 물속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만에야 심심해진 아이가 조르는지 낚싯대 거두더니 할아버지는 손녀 손 잡고 물가를 떠났습니다.
계류 소리뿐인 고즈넉한 숲 속의 시냇가.
그때 돌연 볕 좋은 날 이부자리 일광소독 시키려 내다 널듯, 멍석바위 잔등에 나를 펴 널고 싶었습니다.
반석에 누워 앞뒤로 햇볕 쬐며 세포에 낀 냉기나 눅진 기운 짱짱하게 말리고 싶었습니다.
야트막하게 흐르는 맑은 물 보니 예전 생각나며 빨래를 해보고 싶다는, 전혀 꿈도 꿔선 안 되는 엉뚱한 충동도 생겼습니다.
목에 건 손수건이라도 물 적셔 바위에 걸쳐두고 보송보송하게 건조시키고 싶었네요.
오래전, 발이 고운 뽀뿌링(poplin) 천이 나오기 전까지 이불 홑청은 뻣뻣한 광목천을 썼는데요.
젊은 날의 엄마는 큰 냇가에 솥 걸고 잿물 넣어 필로 산 광목을 푹푹 삶았지요.
삶은 광목 방망이질 팡팡해 정하게 헹궈서 냇가 자갈밭에 서리서리 펴 널어 말리노라면 누리끼리한 천 새하얗게 바래졌지요.
그때 눈부시게 너울대던 하얀 광목필은 마치 눈 내린 것처럼 보였댔어요.
빨래하는 엄마 곁에서 송사리 잡는다고 설쳐대다 꽃고무신 한 짝 두둥실 물살에 떠내려가면 물 텀벙거리며 따라가 찾아오던
기억도 떠오르구요.
아, 또 있어요.
푸새질하고 다듬이질한 이불 홑청 새로 시친 얼마 동안은, 잠결에 몸 뒤척댈 때마다 이불깃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던 기억도 나고요.
은은히 풍기던 잣 풀 내음과 삽상하니 까슬한 광목 감촉도요.
라이엘 캐년에 들어 캠프장에서 야영하는 동안, 그렇다고 날마다 파란 하늘이길 기대하지는 않겠어요.
자욱이 숲에 비 듣는 날은 골짜기 안개와 벗하고, 칠흑 같은 밤 별빛 사이 은하를 건너는 일도 각별한 운치일 테지요.
명년 여름엔 일찌감치 하이 시에라 캠프장을 예약해 두고, 이 물가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몇 며칠 소슬함에 젖는
힐링타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굳이 명상이니 선(禪)이니 묵상이니 하며 폼 잡을 것도 없습니다.
일단 생명의 리듬에 집중해 보며 온전한 쉼에 들어가 보려 합니다.
평소의 빠른 호흡 내려놓고 오욕칠정으로 격랑 치는 감정 다스려보려 합니다.
느릿느릿 게으름 부리며 잡다한 생각으로 빡빡한 머리 비워보려 합니다.
그다음엔 자연의 기운과 내 숨결 일치시켜보려 합니다.
자연에 말 걸어보려 합니다.
천천히 숲길 걸으면서 나무에, 구름에, 하늘에, 새소리에, 물소리에 귀 기울여보려 합니다.
아니, 이런저런 욕심부리지 말고 그저 그냥 차가운 냇물에 과일도 씻어 먹고 반석에 드러누워 책 읽다가 잠 오면 얼굴에 책 덮고 낮잠도 자구요.
부스스 일어나선 찬물에 세수하고 산길도 걷고 호수도 만나고 들꽃도 보면서.....
무심의 경계에 들어 저절로 영과 육 정화될 것 같지 않나요.
그야말로 선계에 오른 듯도 하겠구요.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기다려 줄 나의 샹그릴라 Lyell Canyon.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설렘이 오는데요.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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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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