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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엘 캐년을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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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Sep 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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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이었다.
요세미티 다녀오다 들른 트왈루미 매도우 초입 라이엘 캐년에 단박 반하고 말았다.
기다려줘, 라이엘 캐년! 내 꼭 다시 오마.
그 자리에서 야물딱지게 새끼손가락 걸고 내심 엄지로 도장 꾹 찍었다.
유별나게 무덥던 올여름, 딸내미 휴가만 눈 빠지게 기다렸다.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라이엘 캐년.
캠핑장에서 며칠 야영하자고 조를 심산이었다.
그러나 구월에 조카 대학 기숙사 데려다주며 여행하는 걸로 휴가를 대체한다 했다.
실망이 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북가주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 1번 도로로 가면 좋겠다 싶었으나 결정은 전적으로 운전하는 딸내미 소관.
한국에서 손자가 도착해 북가주 출발일이 다가오자 딸이 짜놓은 여행 계획을 드디어 알려줬다.
처음엔 자이언트 세쿼이어며 터널 삼나무 다시 볼 겸 킹스 캐년 들러서 가자고 했다.
나중엔 요세미티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120번 티오가 패스가 더 낫겠다며 코스를 변경했다.
쌍수 들어 환영할 의외의 결정, 그러나 좋다는 내색 안 하고 속으로만 얏호~ 쾌재를 외쳤다.
지난해 요세미티 갔다가 그 도로 타고 왔다 했을 때 딸내미 왈 위험한데 다녔다 하기에 길만 좋더라, 한 터였다.
한번 다녀왔다고 그래도 내게 재차 도로 사정과 안전도 확인하고는 결정한 코스다.
티오가 패스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높은(9,845 feet) 데 위치한 도로로, 요세미티 계곡의 노스 림 가는 트레일과도 이어진다.
양 켠에 단아하고도 장엄한 화강암 산봉우리와 호수, 초원, 삼나무 숲 거느린 멋지고 근사한 길로 소문난 티오가 로드다.
모노레익 인근 리 바이닝에서 시작, 요세미티 산길 두세 시간 달리는데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님'이 날 기다리니 왜 아니 설레랴.
일찍이 만해 선사께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 하였잖은가.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드디어 이렇게 라이엘 캐년을 갈 수가 있구나, 일각이 여삼추로 출발일이 기다려졌다.
로미오 만나기로 약속한 줄리엣이 흥분으로 이처럼 가슴 뛰었을까.
오래 그리던 연인이라도 만나러 가듯 속이 다 울렁거렸다.
토요일 우리는 차에 한가득 짐을 싣고 집을 나섰다.
딸내미와 손자, 나와 멍이가 동행했다.
매머드 레익에서 일박하고 이른 아침 티오가 패스에 올라섰다.
휴일이라도 생각보다 도로는 한산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서쪽에 위치한 Yosemite National Park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설명이 필요 없는 절경지.
백설 흔적 군데군데 남겨진 산기슭도 스쳤고 가파른 절벽길도 지나고 크고 작은 청정 호수도 스쳐 지났다.
물줄기 가느다란 폭포, 작은 실개천, 하얀 화강암 산등성이, 평평한 초지도 듬성듬성 보였다.
국립공원 입장료 30불 낸 다음 산굽이 몇 돌다 보니 트왈루미 매도우 표지판이 나타났다.
길가에 줄지어 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도 주차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는 청량했으나 약간 추울 정도로 쌀쌀했다.
아는 길도 물어가랬다고 마침 바로 옆에 레인저 둘이 서있기에 라이엘 캐년 들어가는 길을 찾는다고 했더니....
맞은편 소로를 가리키며 바로 저기로 들어가면 된다면서 함께 있는 멍이를 보더니 동물은 출입 금지 구역이라 하였다.
Lyell Canyon 시냇가 따라 평화로이 펼쳐진 초장이 트왈루미 매도우까지 끝 모르게 이어지는 곳.
라이엘 캐년 암반 위로 흐르는 맑디맑은 냇물은 트왈루미강의 한 지류다.
헤츠 헤치 밸리의 트왈루미강을 막아 만든 댐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전 지역의 식수원이다.
Hetch Hetchy Aqueduct을 통해 샌프란시스코 물 필요량의 85%를 공급해 주는 상수원이므로 당연한 조치였다.
헤츠 헤치는 인디언 말로 '먹을 수 있는 씨앗 품은 각종 풀들'이라니 투명한 그 계곡은 온통 녹음방초 풍요로운 들판일 터다.
군말 없이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아쉽고 안타깝고 야속한 일이지만 규정이 그러하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만일 여름철 여기 캠핑 오기로 했다면 미리 확인해보고 나서 녀석을 다른데 맡기는 조처를 취했을까?
아마도 딸내미는 녀석 데리고도 아무 제재 없는 비숍 쪽 호숫가 캠프 그라운드로 가자고 했으리라.
라이엘 캐년을 뻔히 보고도 놓쳐버린 채 다시금 속다짐을 했다.
조금 더 기다려줘~언제이고 반드시 다시 찾을 기회 있을 테니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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