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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맹 탈출을 도와준 오래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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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Sep 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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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집에 있는 컴퓨터를 오로지 타이프라이터 대용으로 썼다.
그것도 애들이 미리 다 작동되도록 설치시켜 주면 워드로 문서 작성만 겨우 할 줄 알았다.
켜고 끌 줄도 몰랐다.
기계라면 뭐든 일단 낯가림부터 하는 심한 기계치다.
그러니 컴퓨터 조작은 우주선 가동만큼이나 어려운 일 같았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해두자 싶어 문화센터를 찾아갔다.
컴퓨터 기초반에 등록했다.
처음엔 마우스만 쥐여줬다.
배운 지 며칠이 되었건만 마우스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도무지 벽창호처럼 꽉 막혀 진전이 없었다.
얼굴이 후끈, 잔등에서는 땀이 났다.
다들 새파란 청춘들인데 나 혼자만 사십 대였다.
체면이 있지 창피해서도 그 교실에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충청도 사람 유난히 중시하는 게 체면, 나쁘게는 허울뿐인 체면치레다. ㅎ
당시 한창 입시 준비로 바쁜 아들을 붙잡고 한갓지게 컴퓨터를 배울 수도 없었다.
딸은 엄마의 둔한 머리가 한심해 일찌감치 개인교습을 포기한 터다.
그래, 나도 아더매치다.
까짓 거 안 배워도 산다... 구시렁 공시랑~~
혼자 야속해하며 짐짓 토라져 지내던 중 90년대 중반 딸내미가 미국으로 단기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위 사진이 그때 엄마를 위해 컴퓨터에 관한 기본 자료를 작성해 놓고 간 메모의 일부다.
암튼 몇 년 후 이민 가방에까지 이 노트를 모시고 온 거 보면 자못 중요하다 여겼던 듯...
당시 끝내 컴퓨터를 익히지 않았더라면 이즈음 지천인 시간을 어찌 보냈을지 만일이란 가정조차 상정하기 싫다.
당시엔 간편하니 얇은 노트북이란 컴퓨터는 상상도 못 하던 때다.
모니터 뒤편이 불쑥 튀어나온 큼직한 컴퓨터뿐이던 시기다.
노트 첫 페이지는 컴퓨터 켜기로 시작된다.
1. 플러그가 연결된 빨간 스위치 2개를 켠다.
2. 본체 스위치를 켠다.
3. 모니터 스위치를 켠다.
...
그다음 페이지는 인터넷 들어가기.
그다음은 컴퓨터 끄기.
그 외 문서 파일 스캔 시 스캐너 사용법. (요즘은 전자동이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처법까지 요렇게 세세히 짚어 손에 딱 쥐여주지 않으면 쩔쩔매며 허둥대는 엄마다.
툭 한마디 던져 가지고는 엄마의 기억회로에 착실히 저장되기란 어림없다는 걸 아는 딸.
그러니 순서대로 미주알고주알 써놓아야 안심이다.
이후 훈장님의 저 노트 덕에 살살 컴퓨터와 친해져 갈 수 있었다.
해서 딸이 귀국하자마자 졸라서 기어이 98년엔 홈페이지까지 떠억 만들었다.
미국 오기 전까지 그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이 놀았다.
2천 년 대 초 미국 땅에 닿고 보니 인터넷 상황이 한국과 많이 달랐다.
우선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려있지도 않은 데다 발을 디딘 현실 역시 컴퓨터나 하며 희희낙락 노닥거릴 계제가 전혀 아니었다.
다시 컴퓨터와 놀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후였다.
그런대로 주어진 여건에 익숙해지며 본정신을 수습할 만하자 다시 컴퓨터와 열애에 빠졌다.
야후에 블로그를 개설해 틈틈이 몇 해 잘 놀았다.
그때 자연스럽게
'놀잇감'이란
글을 썼다.
또각또각 블로그 삼매경에 빠져 지내던 준
어느 해
겨울, 한동안 블로그 상태가 불안정하더니 한국 야후가 철수하며 동시에 사라졌다.
마치, 개구쟁이가 뭉개버린 개미집 주변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개미처럼 이리저리 헤매 다니던 중 2012년 그해 여름 만나게 된 미주 J 블로그다.
그때 동시에 네이버에도 블로그 개설을 하긴 했으나 미국에 있다 보니 같은 지역 블로그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암튼, 기계에 관한 한 미개인 수준이던 내가 그간 여러 훈장들의 지도하에 여기에 이르렀다.
문명 지진아의 컴맹 탈출기는 물론 여전히 현재진행형.
탈출을 도와준 나의 훈장님은 워드를 가르쳐 준 아들과 컴퓨터의 기본에 대해 자상히 알려준 딸내미다.
그림판을 가져다주고 음악 넣기, 영화 보기로 안내해 준 손주넘은 그 외 다양한 기능도 접하게
해 줬다.
다시금 딸내미가 추후 컴 기능 추가 보완 작업을 도와주는 훈장님으로 바통을 이어갈 것 같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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