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느낌이 좋은 9월 아침나절, 요한 씨가 다녀갔다.
마냥 사람이 좋기만 해서 더러는 싱겁다느니 대책 없이 산다는 소리를 듣는 그다.
만만찮은 이민살이, 제 몫 챙기기에도 바쁜 터에 주변의 궂은일과 힘든 일 슬그머니 거드는 그다.
버겁게 지겟짐 지고 안간힘 쓰며 일어서려는 지게꾼 등 뒤에서 넌지시 힘 받쳐주는 사람,
나는 그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영악스럽다 못해 그악스럽게 사는 사람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란 어림없을뿐더러
손해 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사람들 눈에 그는 대책 없이 비칠 수도 있으리라.
낮에 들린 요한 씨가 “이거 요셉 주세요”하며 놓고 간 포장지를 풀어보니 생선 비늘 긁는 칼이 들어있다.
마침 찌를 사려고 낚시용품점에 갔다가 그 도구가 눈에 띄면서 낚시 친구인 요셉 생각이 나더라는 것.
잡은 생선이 클수록 묵은 연륜만큼이나 비늘이 단단해 그걸 손질하려면 온 데로 비늘이 튀는 터라 뒤치다꺼리가 꽤나 번거로웠다.
그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줄 작지만 아주 쓰임새 요긴한 도구가 그것이었다.
고맙다며 깊이 고개 숙인 인사는 치레가 아니었다.
가격의 고하가 문제 아니고 받아서 맛도 아니었다.
절로 자신이 돌아보아졌다.
나라면 ‘이런 게 다 있네, 그 집에 필요할 건데’ 정도로 단지 생각에 그쳤을 것이다.
그것을 계산대에 가져가 돈을 지불한 다음 운전을 더해서 전해주고 가는 수고를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을까.
이해득실을 떠난 소박한 뜻으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그럴 수 있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거기까지 마음 씀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흉중에 오래도록 따스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뒤뜰 좀 내다보세요, 살그머니요.” 하고는 끊기는 전화. 조슈아 엄마다.
같은 상가에서 요가교실을 하는 그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얼른 뒤쪽으로 난 문가로 다가서 보니 세상에나!
거기에는 사슴 가족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윤기 자르르한 아기 사슴 세 마리를 데리고 마실 나온 보호자 엄마 사슴.
과연 혼자 보기 아까운 그림이었다.
얼마 전, 옆가게인 사진 스튜디오 앞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는 그녀를 보았다.
남의 집 꽃이라도 관리 소홀로 잎이 시들시들 쳐져가는 걸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모양.
상가에서 제일 일찍 문을 여는 그녀라, 이른 시각 주차장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는 것도 그녀다
출근길의 크리스티나 씨가 묵직한 비닐봉지 하나를 현관에 들여놓고는 바삐 차를 몰아 휑하니 상가를 빠져나간다.
이민살이 사십 수년 째라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억센 갱상도 사투리 그대로다.
고향이 상주래요, 하던 그녀는 지금도 '단디 보소'라든가 '억수로 무거버요' 따위 사투리가 자연스럽다.
파독 광부였던 남편이 미국으로 건너와 자리 잡자 상주 촌색시가 영어 한마디 못하며 따라온 미국이란다.
그녀가 건네주고 간 봉다리를 열어보니 냉동 생선 두 마리에 때롱때롱한 풋대추에 큼직한 단감이며 방울토마토.
거기에다 조선 풋고추, 들깻잎이랑 야들야들한 애호박이 별도의 봉투 속에 각각 들어있다.
거기에다 맥반석구이 오징어 한 마리도 기다리고 있다.
며느리가 한국 갔다 왔다더니 그녀가 사 온 모양이다.
생선도 그러하지만 애호박도 비닐랩에 야무치게 꽁꽁 싸여있다.
냉장고에 오래도록 보관해도 별 변질 없이 뒀다 먹을 수가 있는 간수법이 바로 비닐랩으로 잘 싸매기다.
친정 올케가 올망졸망 챙겨주는 보따리 내용물 같은 먹거리들.
물으나마다 바다낚시를 즐기는 그녀 남편이 잡아와 얼려둔 생선일 것이고 자기 집 너른 뜰 곳곳에 심은 과수와 뒤편에다 일군 텃밭에서 거둔 채소들.
낮, 그쪽 가게가 한가할 시간을 틈타 잘 먹겠다고 전화를 하니 뭘 그까짓 거 갖고 일부러 전화해요, 한다.
이웃 교민들의 인정 나눔은 마치 한국의 50년대 인심하고 비슷하다.
특히 교우 간의 마음씀은 동기간처럼 따뜻하다.
제사상 물린 다음 나물밥이나 과일 쪽, 전 부스러기 같은 별식도 못 되는 그저 그런 먹거리를 오륙십 년 대는 이웃과 나눠먹었다.
찐 고구마에 쑥개떡, 김 오르는 수제비 그릇이 흙담 위로 건네지던 푼푼한 시골 인심을 떠올리게 하는 일 다반사인 교민사회다.
해물 넉넉히 넣고 부추전을 부쳤다며 뜨거울 때 맛보라면서 접시째로 들고 오는 교우가 있는가 하면 김밥을 쌌다고 가지고 오는 이도 있다.
감주가 시원타고 들고 오는 친구에 심지어 칼국수 끓였다며 냄비에 퍼들고 차 부르릉~ 몰아서 오는 이도 있다.
올여름 가만 앉아 얻어먹은 호박만도 네댓 덩이, 들깻잎에 풋고추에 가지에 오이뿐이랴.
고춧잎 삶은 거며 오이지 담은 거도 나눠먹고 곧 청둥호박도 둥실둥실 들어다 부려놓을 것이다.
헌데 정작 나는 늘 앉아서 받기만 하며 언제 무엇으로 어떻게 이들의 정에 답을 하지?
그래, 베푼다는 의미의 보시에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누구라도 항상 상대의 좋은 점을 찾아 마음으로 칭찬하는 말 그리고 성원 격려의 덕담 한마디.
이처럼 아름다운 말로 이웃들과 기쁨을 나눌 수 있지 않은가.
수시로 명품 사 모으는 며느리를 나이 어려 아직 철이 안 든 탓이라며 외려 안쓰러이 여기는 이 마리아 씨.
효부상을 받은 바 있는 부모님의 내림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황당한 행동을 하는 치매 노인 수발, 그것도 훌쩍 미국으로 떠난 남편과 다시 합쳐질 날만 기다리며 한국에서 13년을 두 자녀 거느리고 홀시어머니 모신 그녀였다.
내 수준으로는 어림없는 노릇이다.
가정 돌보지 않는 남편도 야속할 판에 거기다 아무 자손도 반기지 않는 치매 노인을 지성으로 모신다는 건 솔직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라면 틀림없이 굴곡진 가정사를 들먹이며
그 상처로 소나무 옹이 비틀리듯 비틀린 심사에다 대고 소금을 뿌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너그럽기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속만 같다.
그만한 도량이니 철없는 며느리 다독이며 집안 편안케 할 수 있는 것.
얼굴은 얼의 꼴, 즉 마음을 반영하는 게 얼굴이라는 얘기다.
동갑내기인 그녀의 편안한 얼굴을 대하면 책임 못 진 내 얼굴에 자괴지심이 들곤 한다.
남편이 걸핏하면 바보 바보, 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애칭이라 받아들이는 베로니카 씨.
옆에서 보기 민망 그럴만치 대놓고 면박을 줄 적도 있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 투정 받아넘기듯 태평인 채 잔정이 많아서라고 좋게 이해한다.
괜히 짜증 부리는 남편을 보면 일이 피곤한 것 같아 측은히 여겨진다는 그녀 가슴은 대천 앞바다다.
놀라워하는 내게 “일일이 맞서봤자 뭐해요. 그냥 지고 살면 편한걸요.” 한참 수하인 그녀의 답이다.
그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 본다.
바보란 말에 대뜸 발끈해서 기분 나쁜 표피 역력히 드러내며 반응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속으로라도 ‘그래 넌 뭔데’라고 뻗지르며 한 마디쯤 대거리를 할 게 뻔하다.
그러다 오고 가는 거친 말, 결국은 시궁창 물 뒤집어쓴 듯 온종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나는 비좁은 소갈머리의 소유자.
요한 씨나 베로니카 씨 등등 다들 CHURCH OF ST.JOAN OF ARC, 우리 식 발음으로 쟌다크성당 교우이자 이웃들이다.
한국에서 누가 왔다 하면 오징어나 멸치 김 쥐포 따위는 공식이고 테라마이신 연고에 사리돈도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나눠준다.
아주 오래전 방물장수 등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진기한 물목들이 비행기 타고 건너온 것이다.
물론 여기도 있을 건 다 있으나 한국에서 갓 직송된 물건이라서인지 맛이나 효능도 더 나은 것 같음은 단지 기분?
먼 데서 온 오징어, 그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맥반석구이가 느긋한 주말 오후 맥주 한잔을 곁들이게 하겠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미쁜 사람들.
무심히 허리 굽혀 쓰레기를 줍는 선행, 나아가 나를 버리고 낮추는 자기희생으로 땅에 묻혀 꽃을 피워내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관습과 정서가 다르다고 사람 사는 것이 유다른 것은 아니다.
날마다 만나는 미국인 손님들 역시 단순한 거래자가 아니라 따뜻하고 좋은 이웃들.
그들의 친절한 관심, 배려, 미소는 나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늘 수고했으니 여름휴가 넉넉히 즐기라는 손님, 옷이 멋지게 나왔다며 액설런트 굿잡! 엄지 척을 해주는 손님,
일터에 잔잔히 깔린 음악에 맞춰 왈츠 스텝 밟는 손님, 프런트의 화초들 이쁘게 가꿨다며 쓰다듬는 손님, 브로치가 옷과 잘 어울린다며 추켜주는 손님....
칭찬의 말,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 그들을 통해 나 또한 一日一善의 의지를 다잡아 나간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이처럼 작은 마음 씀씀이.
작지만 큰 사랑이 모이고 모여 세상은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이리라.
2005 미주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