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뒤로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났다. 에어 프랑스 좌석 앞의 모니터가 현재의 항로를 보여준다. 아시아 전도(全圖)가 짙은 청색 바탕 위에 떠 있으며 비행기가 날고 있는 방향을 표시하는 화살표가 또렷한 백색 선으로 점점이 그어졌다. 이미 홍콩은 거쳤고 인도지나 아래쪽으로 흰 선이 바쁘게 달음박질친다. 내 시선은 저절로 대륙의 한 끝에 콩 꼬투리처럼 매달린 우리나라를 찾게 됐다. 덩달아 그 발치의 일본 열도가 눈에 띄었다. 한반도를 공손스레 두 손으로 받치는 형상을 한 일본과 사할린. 거기 싸 안기듯 한 동해는 마치 하얀 연꽃 봉오리 같았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동해란 이름은 온데간데 없이 바다 전체가 ‘일본해’ 였기 때문이다. 통째로 일본해라 칭해지고 있는, 실종된 우리의 동해. 분명히 지리부도에 동해라 명기되어 있고 그렇게 배워왔으니 당연히 동해는 우리 바다로 알고 있었는데 JAPAN SEA라니?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땡감을 한입 덥석 씹은 기분이었다. 무언가가 가슴에 턱 걸린 듯한 고약한 느낌이기도 했다.
동해가 버젓이 일본해로 표기된 채 이렇게 통용되고 있음에도 외국 드나들기를 제 집 들락거리듯 하는 외교관들은 어이해 수수방관만 했더란 말인가. 숱하게 외유를 즐기는 금배지 단 분들은, 나의 과문 탓인지 몰라도 또 어찌해 못 본 척 입 다물고 잠잠했던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의 첫머리에 나오는 동해다. 아침 해가 광휘롭게 떠오르는 바다이자 우리 땅인 울릉도와 독도가 있는 바다가 동해다. 백두산과 더불어 우리 민족에겐 성스러움의 표상이기도 한 동해. 나라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는 동해는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온 영원한 우리의 바다임에도 국제적으로 통용되기는 일본해라니 이런 기막힐 데가 어디 있을까.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영해 영공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두말할 것도 없이 동해는 우리의 바다다. 동해 명칭을 바로 잡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영토에 대한 주권 포기이자 국가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다. 안 그래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과 툭하면 입씨름을 벌여온 우리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동단에 위치한 독도는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정벌하여 신라에 귀속시킨 엄연한 우리 땅이다.
16세기 유럽 각국이 극동 지역으로 진출하며 제작한 고지도 다수가 명백히 한국해라 칭했던 우리의 바다인 동해. 일본 역시 명치 초기까지 동해를 조선해로 하거나 바다를 반으로 나누어 한국 쪽은 한국해, 일본 쪽은 일본해라 규정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쇄국 정책을 펼 당시, 세계로 뻗은 일본이 일본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하다가 조선이 식민지화되자 본격적으로 일본해라 못 박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주권이 없었던 1928년 국제 수로 회의에서 일본해로 공인받은 뒤 관례를 들어 계속 일본해라 고집하고 있는 거다.
결국은 국력의 쇠미 탓에 서른 세해 동안 나라를 잃었었고 아웅다웅 살기 바빠 오래도록 바다는 관심권 밖으로 밀쳐진 채 방치되 있었다. 우리의 바다 동해를 일본의 안마당으로 삼게 할 수는 없으며 영해를 둘러싼 영토 분쟁의 빌미를 더 이상 제공해서도 안된다. 한때의 국권 상실로 잃었던 지명을 되찾아 바로 잡아 놓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자 의무이다. 주장만 가지고는 안된다.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타당성 있는 명분하에 일을 추진해야 할 줄로 안다. 국제적으로는 공인이 필요하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유럽 고지도의 대부분이 한국해라 명기해 놓은 우리의 바다 동해. 어느 단체에서든 동해 명칭에 대한 국제적 공인 노력을 위한 범시민 서명 운동이라도 벌인다면 맨 먼저 달려가 도장을 꾹 찍으련만. 1993
여기까지는 20년 전에 발표된 글이다. 처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던 에어 프랑스 기내에서 쓴 글이다. 요즘 들어 다시금 유엔 산하 국제수로기구(IHO)가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단독 표기하기로 하고 최근 미국과 영국이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한다. 이에 대응, 언론사가 앞장서서 '동해 표기 바로잡기 범동포 서명 운동’을 펼친 것은 지난 추석 무렵부터다. 당연히 교민들이 뜨겁게 호응하며 적극 동참하는 등 참여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당시 뉴저지 남부에 사는 나는 그때껏 서명 용지를 구경도 못했다. 길을 찾던 중 지난 신문을 뒤적여 드디어 참여할 수 있는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다. 아직도 유효하길 바라며 얼른 메일을 보냈다.
요기까지는 2013년도에 쓴 내용.
근자 들어 요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독도 지우기라니? 괴담일까, 선동질일까.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평화라인'으로 영토에 포함시킨 이후 독도는 대한민국 독립과 극일의 상징물이 돼있다. 독도는 국민통합의 성소에 다름 아닌 곳이거늘.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 국정농단을 넘어 국기문란에 해당하는 디올백인지 뭔지부터 채일병 사건에 이어 다량의 마약이 공항 보안 시스템을 허문 괴이쩍은 사건까지 국민은 그 진실이 알고 싶으며 소상히 밝혀지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