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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 맥파(麥波)처럼 미파(米波)라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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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Sep 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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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자운영 꽃 만나보러 몇 번 왔던 하논 분화구다.
사월엔 비닐하우스 안에서 서로 비비적대며 연초록 모판이 키 돋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월 초, 개구리 소리도 들을 겸 모내기가 얼마큼 진행됐는지 보려고 하논에 갔었다.
운 좋게도 유월 말에 들렀다가 이앙기로 모내기하는 현장을 접하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 삼매에 빠졌었다.
초여름 석양 무렵, 벼가 어느 정도 자랐을지 궁금해 하논으로 향한 적도 있다.
마치 내가 논농사라도 짓는 양, 이번엔 벼가 패었나 보러 간 하논이다.
예술의 전당 맞은편 길로 접어들었다.
귤밭 짙푸르나 어느새 감귤은 노란 기를 내비치는데 폭염을 견디다 못해 껍질이 갈라진 열과가 제법 보인다.
영농기술 제아무리 발전했다 한들 비켜갈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감귤 농가 수심 깊겠다.
도로변 개울에서 전에 없이 콸콸, 또랑물 흐르는 소리 힘찼다.
그간 비가 잦아 하논 배수로 물도 제법 불어난 모양이다.
하논 농지로 들어가는 초입 밭뙈기에 울금이라 불리는 강황 잎새 무성하다.
어쩐지 꽃은 노랗게 필지도 모른다 싶었는데 아주 여린 분홍색 꽃이 옆구리에 솟아있다.
옥수수자루 달리듯 넌출 대는 이파리 사이에 핀 강황 꽃을 그렇게 만나보았다.
울금을 알게 된 건 지난해, 매미성을 가던 중 생강 잎 비슷하면서 큰 잎 너울거리는 바나나 나무 닮은 낯선 식물을 보았다.
이건 바나나 경작지야, 생강 밭이야?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이 식물은 근자 각광받는 울금이라고 알려줬다.
세월이 사오십 년 흐르니 자연스럽게 묻는 쪽과 가르치는 쪽 위치가 뒤바뀌었다.
이젠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에 호기심 천국인 천상 아이다.
어머나, 얘네들은..... 향수 어린 정경이었다.
아주 오래전 작은할아버지 댁 풍경이 고스란히 겹쳐졌다.
농가 마당귀 감나무 아래 누르스름한 풋감이 떨어져 여럿 뒹굴었다.
털썩 퍼질러 앉아 으깨진 감도 있지만 살포시 낙하해 상하지 않고 멀쩡한 감도 있었다.
홍시 되어 이미 단물 배어든 감이라 꼬맹이들 주전부리감으로 그만이었는데.
새벽부터 부지런 떨어야 득템 할 수 있는 귀한 선물 같았던 감이며 뒷동산 풋밤이며....
키 나지막한 대추나무에 총총 매달린 탱글탱글 대추도 알이 꽤 실해졌다.
안뜰에는 소박한 우리네 정서가 담긴 봉숭아, 맨드라미 정겨웠다.
덩실하게 매달린 호박 익어가고 양철지붕에 하얀 박꽃도 피어있음 직했다.
조붓한 농로가 하논 분화구 안으로 길게 이어졌다.
여름내 도랑물 틉틉하게 고여있던 배수로에 물 그들먹하게 흘러갔다.
물가에 푸른 열매 총총 열린 율무 한껏 왕성했고 흔들흔들 작은 수초들 무수히 떠있었다.
저만치 구불대며 흘러가는 기다란 끄나풀은 왠지 물비암 같아 화들짝 그 자리를 떠났다.
가녀린 실잠자리, 고추잠자리보다 진한 홍잠자리, 머리가 청남색인 왕잠자리까지 물 위를 선회했으나 사진 찍을 맘 달아나 버렸다.
멀리서 세를 불리고 있다는 태풍 여파인지 거센 바람이 물비늘을 일으켰다.
수은주가 쑥쑥 치솟으며 유독스런 염제 맹위 떨치던 팔월이 떠나고 구월을 맞았다.
불안감 고조시키며 기상변화, 기후위기로 당장 지구가 요절날 듯 설쳐댔지만
절기 앞에선 다들 무릎을 꿇었다.
열대야가 이어져 50여 일 넘게 겪은 고초 단숨에 잊게 하는 바람결 설렁대, 밤에는 차렵이불이 필요해졌다.
간사할 사 인간 마음, 좀 있으면 춥다 소리 나올 게다.
해풍 시원스레 이는 아침나절, 폭양 기승부리기 전에 찾은 하논이다.
일찍 모내기를 한 논은 어느새 벼 이삭 고개 숙인 채로 묵직이 나붓거렸다.
이앙기로 늦게 모내기를 한 논배미는 아직 꼬투리 여린 벼 이삭인데 낱알 여문 벼도 보였다.
바람이 불어 제킬 때마다 벼는 자로 모로 휘청대며 물결처럼 일렁일렁 파도쳤다.
청보리밭에 이는 바람은 맥파를 만든다, 하면 벼논을 스치는 바람은 이름하여 미파라 불러도
괜찮겠다.
하논분화구는 여러모로 특기할 만한 장소다.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며 생태계 타임캡슐로 불리는 하논은 한반도 최대이자 유일한 마르(Maar) 형 분화구이다.
마르형 분화구는 용암이나 화산재 분출 없이 지하의 가스가 지각 틈을 따라 한 군데로 모여 폭발하면서 생긴 분화구란다.
따라서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희귀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거나 철새들 도래지로 이번에도 흑두루미를 보았다.
서귀포시 호근동과 서홍동 일대에 걸쳐있는 하논분화구는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3만 여평 논에 벼농사를 짓는 지역이다.
한라산에 쏟아진 빗물이 지하 암반층을 타고 내려오다 하논 분화구에서 솟아난 용천수, 그 물로 농사를 짓는다.
빗물을 모아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원 바탕은 삼다수로 짓는 벼농사인 셈이다.
그리 귀해서인지 쌀은 시판되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주문 판매만 한다고.
장화 신고 척척 논둑 다지던 여장부 농민과 친분 도타워졌으니 그녀에게 부탁 살짝 해볼까.
당연히 농사지어 알곡은 농민들이 걷어가지만 볏짚은 시에서 매입해 겨우내 논바닥에 고루 깔아 둔다.
늦가을 나그네 새들이 날아와 볏짚에 남은 꼬투리 알뜰하게 이삭 줍기를 하며 여기서 겨울을 나기 때문이다.
해서 만추의 하논 들녘으로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다음 달쯤 다시 오면 가을 햇살 아래 벼포기 눗누렇게 익어가는 금빛 논배미를 볼 수 있으리라.
그때 콤바인으로 벼 수확하는 현장 담으러 머잖아 하논은 또다시 찾게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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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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