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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섬

by 무량화

운해. 태초의 혼미인 양 아득한 구름바다. 노고단은 이미 산이 아니었다. 홀연 모습 감추었다가 환영처럼 다시 태어나는 산. 그렇게 끝없이 부침하는 산봉우리는 먼바다에 뜬 섬이었다. 신비의 섬이었다.



매 순간의 변모가 외경스럽기조차 한 섬. 자욱하니 모습 감춘 下界는 도원경이듯 아득했고 돌연 폭발하듯 솟구치는 한 덩이 암봉은 천지개벽의 신호처럼 보였다. 구름의 손짓. 뛰어들라며 사뭇 몽환적인 눈빛으로 유혹하는 충동질 아니라도 도연해지는 기분 그대로라면 넉히 투신할 수 있으련만 깊이 모를 그 심연의 아득함이라니.



비밀의 섬을 은밀하게 감싸면서 고요히 흐르는가 하면 난폭하게 휘감기다 미친 듯 내닫는 구름장. 겹겹의 구름은 순백의 설원이었다가 성난 파도이기도 했다. 급류 거슬러 오르는 은어 떼였다가 날쌘 한무리 야생마로 질주하기도 했다. 격정의 집시였다가 일순 흩어지는 백일몽이 되기도 하는 구름의 늪. 거기 갇혀 속수무책인 나. 포박당한 듯 무기력하기만 한 나. 까마득 인적과 멀어진 절해고도 같았다. 그곳은 차라리 외딴 유배지였던가.



옴짝할 수도 없었다. 방향 감각은 물론 의식마저 몽롱해지는 느낌으로 허적대는 발길은 아예 운해에 묻어두기로 했다. 허둥대면 댈수록 모래수렁에 빠지듯 가뭇없이 스며들어 버릴 것 같은 공포감. 두려움 곱씹으며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갑갑한 시야가 걷히기만을 기다릴밖에 없었다. 초조했지만 막연히 그저 그냥.



무한 공간을 자유로이 배회하다 드디어 탈진해서 제풀에 스러지기까지 거듭거듭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운해. 마침내 햇살에 밀린 구름의 승천. 반나절의 최면과도 같은 혼돈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구름의 섬을 내려섰다.



피아골 계곡은 깊디깊었다. 골짜기는 한없이 계속됐다. 물소리는 굉장했다. 이름 모를 뭇새 지저귐, 풀벌레 소리. 무중력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들뜸도 잠시. 이번에는 구름 대신 소리의 섬에 던져진 유형수였다. 산간을 쩡쩡 울리는 물소리는 차라리 포효였다.



그 격렬한 용틀임에 산은 통째로 무너질 듯했다. 바위에 부딪쳐 깨어지고 부서지는 물굽이. 흰 물보라. 오솔길의 시작은 청류와 함께였고 온종일 귓전에 소리 거느리고 산길을 걸었다. 때론 내를 뛰어넘고 징검다리도 건넜다. 폭포며 沼며 소용돌이 휘도는 거센 물살도 만났다. 산 아래 접어들수록 계곡의 폭 드넓어지며 아우성치듯 요란한 물소리. 귀가 먹먹했다. 산을 다 내려와서 계류와 멀리 작별한 뒤에도 집요히 그 소리는 들려왔다. 풍경이란 풍경은 죄다 사라지고 오직 남아있는 건 자연의 소리, 소리의 범람.



고행하듯 걷고 또 걸은 산행 뒤의 노곤함. 기진한 심신을 지리산 아래 토담집에 뉘었다. 여전히 따라붙는 물소리. 환청이었다. 베갯머리 감도는 여울물 소리에 더욱 또렷이 깨어나는 의식. 삼경도 지난 깊은 밤. 쉬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데 비 오듯 와글거리는 참개구리 소리. 거기에 아주 낮게 그러나 틀림없는 간격으로 우는 소쩍새 소리. 애소하듯 종내는 피 토하듯 허공 가르며 비수로 꽃혀 드는 소쩍새 울음. 보름 무렵도 아니건만 때늦은 달빛이 봉창에 어렸다. 일렁이는 오동나무 그림자에 문득 겹쳐지는 한 여자의 춤판. 왜일까. 하필이면 그 순간 홍신자의 춤 <古島>가 떠오름은.



범종의 긴 여운에 이어지는 북소리는 음산했고 괴기스러운 징 울림. 최대로 절제되고 응축된 몸짓은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섬보다 더 적막했기에 섬찟하도록 긴장감 휘감기는 전율이었다. 맨발에 무명 같은 허술한 옷가지 걸친 채 탐욕 자르듯 낫으로 머리카락을 내리 자르는 행위에의 몰두. 와중에 하늘 우러러 초혼하듯 절규하듯 내지르는 한 서린 곡성. 이어서 마구 허공을 난자하는 낫의 번득임. 그녀의 무대는 절망과 구원. 광기와 침잠. 본능과 영혼. 허무와 격정. 환희와 좌절. 혼미와 경악. 신비와 평화와 자유와 고행.



별개의 개념들이 두서없이 떠오를 뿐 한 단락의 문장은 영 이루어지질 않았다. 전혀 색다르고 강렬한 충격 때문일까. 단어 낱낱은 구두점 찍고 외떨어져 저 혼자 서성였다. 圓 사상이나 끝없이 돌고 돌며 교차하는 윤회법이 아니라도 한계의 끝 극한치는 결국 원점에 이르는 것. 始와 終은 한 점이었고 그래서 원초적이며 자연적인 것과 전위 예술은 하나로 통하는가. 서로 상통하게 마련인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극과 극.



문득.... 산에 오르고 자연 속에 안김은 神 곁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인간 원형의 욕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리산 아래서의 한밤 내내 비몽사몽 간을 헤매다 새벽녘 이윽고 침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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