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까지는 산책 삼아 걷기에 딱 알맞은 거리다. 아파트 잔디밭을 가로질러 오래된 다리가 걸린 시내를 지난 다음 단풍나무 숲길 따라서 한 마장쯤 걸어가면 거기에 이르게 된다. 우연히 자리 잡은 지역이 역사소설의 배경이 될만한 장소다. 독립전쟁 당시의 격전지로 이웃한 묘지에 가보면 1800년대 사람들의 묘비가 서있다.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이 보스턴 뉴욕을 거쳐 중부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영국이 고용한 독일 용병대를 격파한 것은 1777년 겨울의 일이었다.
흰 눈을 붉게 물들인 하많은 주검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을 테고 주인 잃은 말은 지향 없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로 연유해서인가. 단풍나무숲에 비바람 거센 날 혹은 달빛이 은가루로 쏟아져 내리는 밤이면 그때의 고혼들이 주위를 배회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늘처럼 안개 자욱이 흐르는 날이면 더욱 선연히 떠오르는 그 옛적 풍경...
공연히 마음이 건공중에 떠 안정을 잃게 되는 날이 있다. 팽팽히 조여진 일상의 긴장이 풀어지는 주말 오후의 한적한 시간. 혹은 삶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느닷없는 일이라도 터져 심정이 매우 착잡한 그런 날. 더러는 가벼운 바람결에도 파문 이는 평온한 호심처럼 사소한 말에 상처 입고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도 저절로 발길은 거기로 향해진다.
거친 감정의 격랑은 물론 껄끄러운 기분이며 의식의 혼란스러움을 여과지처럼 걸러내 다독다독 가라앉혀주는 그곳. 개선문마냥 우뚝 선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경계 긋는 붉은 벽돌 아치문을 지나면 곧바로 수많은 묘비들이 낮은 자세로 도열해 있는 메이플 셰이드 세미트리에 이른다. 나 외에도 운동이나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온전한 안식과 그윽한 평화가 함께 하는 곳.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영혼들의 쉼터이니 쭈뼛 무섬증이 일 법도 한데 그냥 근린공원을 거닐듯 아무렇지도 않다. 다람쥐 가족이 부지런히 도토리를 물어 나를 뿐 사위는 아주 고즈넉하다. 조화 꽃 이파리를 흔들며 알맞게 이는 미풍. 항시 똑 고른 키로 다듬어진 푸르른 잔디 위에 담장의 아이비 덩굴이 마실 와 맨발로 왈츠를 춘다. 넉히 몇 백 년 이 자리를 지켰을 해묵은 참나무 꼭대기를 지나던 바람이 비올라 선율을 띄우자 좌우로 둘러싸인 관목 숲 어디선가 고르게 장단을 맞추는 딱따구리 소리.
아득한 평원 너머로 스러지는 해, 서녘을 온통 홍시 빛으로 물들이며 노을이 익어가고 있다. 자연이 펼치는 한 편의 장엄한 교향시를 후광으로 두르고 묘비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유유자적, 뒷짐을 지고 시선을 낮춘 채로 한껏 한가로움을 즐긴다. 곁을 스치는 빗돌마다 크기와 모양과 재질이 제각각임이 비로소 눈에 든다. 삶의 양상이 저마다 서로 달랐듯이 직사각형도 있고 타원 형태도 있다. 대리석 자재를 썼는가 하면 화강암을 사용하기도 했다. 새김 글씨가 풍우에 삭아 생몰 연대마저 희미해진 묘비도 있고 지난해에 만들어져 음각이 선명한 새 묘비도 보인다.
여기서 본 중에 최고로 오래된 묵뫼의 묘비는 1785년에 태어나 1875년에 소천했음을 알리는 묘비다. 그가 고고의 성을 울린 것은 물경 2세기 전, 우리나라는 갓 천주교가 들어온 조선 후기다. 일천한 역사를 지닌 미국이라고는 하나 이 땅에서는 벌써 독립선언서가 채택되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널리 선포한 지 오래다. 그 세월에 임시수도인 필라델피아에는 가로등 환히 밝았고 최초의 종합병원 문을 열기도 했다. 그해 미국 의회는 달러를 화폐의 기본단위로 채택했으며 당시 이미 고층 건물을 올리고 탄탄한 포도를 까는 등 그렇게 다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세계 최강국의 입지를 굳힌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촌을 아연케 한 911 테러 참사에 이은 보복 전쟁으로 지금 미국은 물론 온 세상이 뒤숭숭하기 그지없다. 전쟁에는 정당한 이유나 정당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 그러나 폭력과 테러와 전쟁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거니와 용납될 수도 없는 일.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종교나 이념이 때론 혼돈과 갈등을 야기해 분쟁의 요인이 되기도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임이 부끄럽던 9월의 그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미증유의 대참사였다. 아비규환 그 자체가 되어버린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그리고 워싱턴의 펜타곤. 미국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에 세계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 어처구니없게도 실제 상황으로 터져 긴급 뉴스를 탄 것이다.
치솟는 화염, 곧이어 맨해튼이 검은 연기에 자욱이 잠기더니 잠깐만에 도시의 낯익은 스카이라인이 변하고 말았다. 개인주의에 익숙해져 자신 외의 문제에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미국인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고조되는 애국심으로 뜨겁게 뭉쳐지며 테러에의 응징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 같았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지은 미국 측 시각과 민족의 절대 신앙을 위해 벌이는 투쟁, 즉 성전이라고 보는 견해의 차이. 그렇듯 관점에 따라 사악한 테러가 빛나는 순교일 수도 있으며 이편의 善이 저쪽에선 惡이 될 수도 있게 마련이다.
그즈음, 가뜩이나 불안한 판에 온갖 유언비어가 떠다니고 성급한 추측들이 난무했다. 일각에서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문명 충돌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미국의 오만이 부른 재앙이라느니 편향된 외교 정책에서 기인한 화(禍)라느니 나름대로의 주를 달며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마침내 황량한 아프칸 산악지대에 미사일을 퍼부으며 전쟁은 시작됐다. 칼에는 칼이라는 논리를 입증하듯 그에 맞서 가공스런 백색의 우편물이 떴다. 빈자(貧子)의 핵무기라 불리는 무차별적 대량 살상무기인 탄저균 살포로 세상은 거듭 혼란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테러의 발본색원을 위한 확전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 또다시 이라크를 아수라의 전쟁터로 만들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참혹한 인질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 결국 그것을 그치게 하는 것은 관용과 자비임에도 두 대립각의 첨예한 날은 누그러들지 않는다. 과연 언제나 지구상에 참 평화가 오려는지 여전히 걷히지 않는 전운이 안타깝기만 하다.
전쟁, 우리는 6.25를 겪어봐서 그 참상을 너무도 극명히 알고 있다. 단지 그 땅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기아와 공포에 짓눌린 채 포화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사실. 그러나 자기들의 이념이나 이익에 반한다면 무고한 주검쯤은 도무지 안중에 없는 걸까.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종당 무엇인지, 국가 간의 패권주의가 인간의 최우선 가치인 인명 존중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있는 현실이 아닌지. 나아가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무엇보다 잠시 허락된 인생,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어느 수도원의 묘지 입구에 라틴어로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빈 마음 되어 묵상이나 사색에 잠길만한 아주 조용한 곳이건만 바깥세상의 소요가 떠오르며 문득 그 말이 생각난다. 점차 한기를 느끼게 하는 바람결. 아까부터 주변에서 맴돌던 회색 다람쥐 한 마리 쪼르르 내닫는 출입구 쪽에 어느새 외등이 켜져 있다. -2002. 미주 중앙일보 뉴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