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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우가 있는 보목포구에 제지기 오름

by 무량화

<섶섬이 있는 풍경>은 중섭이 일 년 남짓 서귀포에서 피난살이하던 시절에 남긴 그림 제목이다.

우리집 남창으로는 섶섬이 마주 보이며 약간 왼편으로 제지기오름이 섬처럼 떠오른다.

산의 본성대로 우쭐 솟구치는 대신, 어진 덕성 고스란히 품어 단아하면서도 너무도 고즈넉하게 사려 앉은 제지기오름.

가까이 있지만 섣불리 오르지 않았던 까닭인즉 노자의 세 가지 보물과도 같아서이다.

노자에게 삼보(三寶)가 있으니 그 첫째는 자비로움이요 둘째는 검소함이며 셋째는 감히 천하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자애심, 검박함, 겸양의 도리이기에 나로선 더더욱 조심스럽기만.

심지 넉넉하고 꾸밈없으며 앞서려 나대거나 설치지 않는 겸양지덕으로, 그저 물 흐르듯 무위자연인으로 살고 싶음 또한 과한 욕심일진대.

이처럼 마음속 보물은 함부로 다루거나 대접할 수 없기에 그만큼 내심 아껴둔 오름이다.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해도 칼호텔 지나 소천지만 거치면 보목이 금방이다.

주유천하하는 한량처럼 휘적휘적 걸으며 구름 한 점 거느리지 않은 한라산도 바라보고 서귀포 짙푸른 앞바다도 쳐다본다.

고요히 바라보니 이럴 때는 유심히 지켜보는 관찰이 아니라 여유로이 음미하는 관조겠다.

과일과 알곡 영글게 하는 햇살은 따갑지만 갈바람 시원히 스치고... 무한 평화롭다.

천국에서의 산책이 이러할까, 어디에도 매임 없어 자유로와 좋고 바라는 바 이로 족하니 매일이 충만하다.

알에서 갓 부화한 새끼거북처럼 발길은 바다내음 따라서, 시선은 제지기오름 바라보며 무심결이듯 걷는다.

아무 계산 없이 머리 비우고 그저 걷고 또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이른다.





보목포구에는 제주 전통배인 뗏목 같은 테우 실물과 예전 등대였다는 돗대불이 첨성대처럼 서 있다.


시야 맑은 화창한 날씨라 바다는 청남빛으로 푸르고 시선 바로 앞에 섶섬 그린 듯 선연하다.


흰 물살 끌며 포구를 드나드는 선박들, 꿈꾸듯한 돛단배는 아니나 지중해 어느 한적한 바다를 연상시킨다.


서쪽으로는 멀찌감치 문섬과 새연교 거느린 새섬이 잡히고 동쪽 저 멀리로 지귀도 아슴하다.


수평선이 멀어서인가, 드넓은 태평양은 약간 곡선 져 보였다.

자리물회가 유명한 보목포구에 닿았다.


시인 한기팔은 고향 음식 자리돔을 이렇게 노래했다.


"인생의 참/뜻을 아는 자만이/그 맛을 안다.

한라산 쇠주에/자리물회 한 그릇이면/함부로 외로울 수도 없는/우리 못난이들이야/흥겨워지는 것을."


포구에 고깃배가 들어왔는지 자리돔 손질하는 아낙이 서넛, 비늘치고 다듬느라 손길 바쁘다.


일 킬로에 삼만 오천 원이라며 대목 때라 세일하는 거라고 스리슬쩍 권한다.


오름에 갈 참이라고 하자 금세 시선 거두며 자기들끼리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모터 소리 분답게 볼레낭개라 써진 배가 포구에 들어오자마자 스쿠버 차림의 여러 사람이 내린다.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배인지 정겹게도 배마다 볼레낭개, 이렇게 적혀있어 고향 사투리나 되듯 반가웠다.


바로 앞 섶섬이 스킨 스쿠버의 성지라더니 횟집 옆 허름한 가게엔 스쿠버 교육 안내 현수막이 부산스레 나부낀다.


드디어 아껴 보관해 온 보자기 풀듯 제지기오름 들머리로 다가섰다.

보목포구 앞바다 오롯이 지키는 숲 청청한 제지기오름이다.


원추형 봉우리를 가진 이 오름은 볼 때마다 키가 자라는 거 같다.


직접 올라보니 그럴 만도 하다.


오름 능선 중허리부터 무성한 해송들이 움쑥 키 돋워가기 때문이다.


해안 산지에서 바닷바람 전신으로 받아치며 당당하게 맞서는 나무라 해송이다.


잎이 억세고 나무가 곰(熊)처럼 크게 자라며 우직한 수형(樹型)이라 곰솔로도 불린다.


소나무 숲 덕에 해풍 한자락 스칠 때마다 피톤치드로 심신 푸르게 샤워를 한다.


이같이 제지기오름엔 청량감이 드는 상큼한 솔향 내뿜는 짙푸른 해송이 빼곡하게 군락을 이뤘다.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는 계획조림을 한 듯 엇비슷한 나무둥치로 봐서 얼추 반세기 전에 심은 나무 같다.


리기다소나무처럼 비교적 곧게 자라 목재로 사용되며 생장속도가 빠른 편이고 재질이 단단해 배를 만드는데 주로 쓰인다고.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원목을 엮어 만드는 테우도 이 해송이 아닐까 싶다.



에게게~높이가 백 미터도 안 된다고?


고작 94.8m인 낮은 오름이나 숲 자욱한 외관과 달리 산속에 들면 곳곳이 바위 벼랑이다.


산길 오르는 내내 나무계단 편하게 놓여있지만 대체로 산세 가파른 편이라, 보기보다 높게 여겨진다.


커다란 바위가 여기저기 드러나 있듯 입구가 바다로 향해진 큼직한 굴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동굴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그 옆에 지었을 절터도 있음직은 하다.


섶섬과 함께 이곳에도 천연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된 파초일엽이 암반 틈새 비집고 자생하고 있었다.


바다를 사이에 뒀지만 섶섬에서 제지기오름까지는 1km가 채 안 되는 거리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양치류 관엽식물인 파초일엽과 함께 바닷바람에 후드끼며 샛노랑 꽃 피는 털머위 수북수북 자랐다.


제지기오름은 올레길 6코스에 포함되는지라 인적 뜸하진 않아 호젓해도 과히 휘휘하다는 느낌은 안 든다.


한달음에 오를 만큼 가벼운 코스, 길가에 무당거미가 겹으로 집을 짓고 느긋이 먹잇감을 기다리는 중이다.


잡풀만 우거져있는 정상에 오르니 목전의 섶섬 액자 사진처럼 오롯 떠오른다.


탁 트인 전망은 아니나 짙푸른 소나무 바늘잎 사이 혹은 칡덩굴 위로 보이는 전경 조망하는 이쯤으로도 만족스럽다.

문섬과 범섬 아우르고 은빛으로 반짝대는 서녘 바다 곁에는 삼매봉 봉긋하다.

동쪽으로 시선 돌리면 저만치 지귀도, 망원경을 들이댄 듯 섬 가운데 숲 욱욱하고 등대 하얗게 잡힌다.





하산길은 효돈과 만나게 되는 북사면을 택했다.

어느 산을 막론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내리막은 자칫 낙상 등 미끄러짐을 단디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긴 오르내리는 길 모두 침목같이 단단한 나무계단 길이나 털썩 주저앉기라도 한다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내 경우처럼 나이 들어 골다공증에 노출된 연령대라면 운 나쁘게 엉덩방아 한방에 걷기 안녕! 을 고해야 되니까.

별로 경사지는 아니나 태풍이 지나며 소나무 가지며 솔방울 마구 흩뿌려 놔 위험했다.

솔밭길 걸어본 이는 알겠지만 유달리 솔잎이나 솔방울은 미끄러워 등산화 밑창 최적화돼 있다 해도 미끌대기 일쑤다.

살금살금 거의 새색시걸음으로 살살 내려왔어도 십여 분이면 충분한 하산길.

어느 결에 효돈로 입구가 나타났다.


오래 벼르던 일을 마친 듯 아주 삼빡한 기분.

서서히 보자기 네 귀를 소중스레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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