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연휴로 일 주간을 쉬게 되었더랬는데요. 지난주 토요일부터 놀았으니까 정확히는 근 십여 일을 집에서 지냈는데 술에 물 탄 듯 어찌나 심심하던지요. 집에서도 물론 할 일은 있으나 규칙적으로 딱딱 시간 맞춰 신경을 쓰며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서 영 매가리 없더라고요. 삶의 리듬이 깨져 모든 게 들쑥날쑥했던 그 며칠, 화끈하거나 차진 구석이 없기에 아예 사는 재미마저 떨어지더라니까요. 역시 약간의 긴장감은 삶에 윤기와 활력을 더해주는 거였어요. 30분씩 걷던 운동도 생략되고 두뇌회전시킬 일도 없어지니 하릴없이 노상 컴 놀이나 하다 그도 싫증 나면 전화통 붙잡고 수다... 맺고 끊는 멋없이 흐리멍덩하니 시간을 죽이는 일이란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어요.
주말은 그럭저럭 후딱 지나가고 월요일도 지나자 그때부터 좀이 쑤셨어요. 중간에 추수감사절이 끼어있어 아이들이 올 테니 진득하게 집 청소나 해놓고 음식 준비해 두면 좋으련만 화요일 기어이 판을 벌렸지요. 같이 점심 먹자고 이웃 동네에 사는 브라질 친구를 불렀어요. 한번 뷔페에 초대받은 적이 있어 빚을 진 친구였는데 그녀 역시 학교 안 가니 하루가 너무 길더라며 이메일 보내자마자 신바람이 나서 쫓아왔어요. 스웨터를 입고 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반팔 티셔츠 차림이더라고요. 당연 춥죠. 히터를 높여놔도 추워하는 그녀를 위해 해가 들어 따뜻한 안방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지요. 책상 대용으로 상시 펴놓은 전통 교자상에다 점심상을 봤어요. 준비된 주요리는 샤부샤부였으므로 상 위에 가스불을 올리고요. 김밥도 부지런 떨며 말아놨었어요.
미나리, 배춧속, 청경채, 쑥갓, 숙주, 버섯, 양파를 준비해 두고요. 다시마와 차돌박이를 우려낸 육수도요. 여기에 온갖 채소를 모둠 모둠 넣어 살푼 끓인 뒤 종이같이 얇게 썬 샤부샤부용 등심을 끓는 육수에 살짝 흔들어 야채와 함께 소스에 찍어 먹는 초간단 요리가 샤부샤부잖아요. 식탁 중앙에 올린 가스불에다 즉석에서 조리해 먹으므로 날씨가 추워지면 특히 땡기는 음식이지요. 쇠고기 샤부샤부 외에 주꾸미와 대합조개와 관자살을 이용한 해물 샤부샤부도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고요. 앞접시도 대령시키고 작은 종지에 소스도 알맞게 부었지요. 그날 소스는 간장+ 식초+ 레몬즙으로 만들었고요. 미리 말아놓은 김밥도 상에 가져와 그 자리에서 썰었네요. 메뉴 선택에서부터 밥도 고슬고슬하니 잘 돼 김밥을 곱게 말아놨고.... 여기까지는 90점 정도 줄 수 있었어요.
식사 기도를 마치고 막상 먹으려 하니 오마나~~~ 그녀는 한 번도 방바닥에서 앉은 자세로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 거였어요. 엉거주춤, 양반다리도 못하고 무릎을 꿇지도 못하거니와 옆으로 비스듬히 앉을 수도 없지 뭡니까. 세상에나, 관절에 쇠심 박은 것도 아닌데 굽혀지지 않는 무릎도 있더라니 까요. 무릎관절이 우리처럼 자유롭게 굽혀지지가 않는 거였어요. 그렇다고 비만체질도 아니며 무릎에 문제가 있는 건 더구나 아니건만, 어릴 적부터 도통 써오질 않아서 관절이 굳어진 모양인가 봐요. 미국인들이 정원 손질할 때 보면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못하듯이요. 좌식생활을 해온 우리는 줄곧 써왔기에 유연한 반면, 입식생활에 익숙한 그들은 말하자면 전혀 사용치 않는 관절이라 자연 퇴화된듯했어요. 앉는 연습을 하다가 번번 나동그라져서 서로 마주 보며 얼마나 웃었던지.... 하다 하다 안돼 그냥 상 밑으로 다리를 주욱 뻗고 먹기로 했지요.
그런데 또 낭패가 생겼어요. 이번엔 젓가락질이 도저히 안 되는 거예요. 샤부샤부 건더기를 건져 소스에 찍으려면 젓가락이어야지 포크로는 곤란하잖아요. 지난번에도 우리 집에 여럿을 초대한 적이 있는데 그땐 포크와 젓가락을 다 내놓기도 했지만 워낙 왁자한 분위기라 불편한 점이 있는지 눈여겨볼 짬도 없이 어수선히 지나갔었거든요. 아무리 반복연습을 해도 알리시아는 직접 채소 한 가닥 고기 한 점 건져 내질 못하더라구요. 하는 수없이 아기한테 반찬 얹어주듯 일일이 제가 접시에 옮겨주면 소스를 스푼으로 떠다 섞은 다음 포크와 스푼을 사용해 어렵게 식사를 하더라고요. 해서 본의 아니게 전 우화 속 여우가 되고 말았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녀를 곤혹스럽게 만든 점심시간이었으니까요.
차이 나는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이런 불편을 끼칠 수도 있더군요. 백문이불여일견,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지요. 나아가 무엇이든지 실제로 경험해 봐야지만이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집에 초대해서 딴에는 성의껏 대접을 한다고 했지만 이렇듯 상대에게는 최선이 아닐 수 있더군요. 내 위주로 생각하고 천연덕스럽게 내 식대로 정성을 다하였지만 결국 상대를 위한 배려를 제대로 못한, 아니 등한시한 셈이 되고 말았지요. 그 바람에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여우가 졸지에 되고 만 거예요. 그녀로서는 차라리 햄버거 반쪽만도 못한 부실한 점심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게요. 저 홀로 자기도취에 빠져 자화자찬하는 격은 아니었던지. 의인화된 동물들의 상황 속에 자신을 대입시켜 보니, 살면서 우리가 상대방에게 어떤 태도와 규범들을 적용해야 할지 답이 나오더군요.
아래 사진은 제 양반다리가 너무나도 신기하다며 식사하다 말고 알리시아가 찰칵 찍었답니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이었고요, 전 느긋하게 포식하며 성찬을 즐겼네요. 접시의 수프를 맛있게 핥는 얄미운 여우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