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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다스리는 탑

by 무량화

하필이면 왜 이토록 머나먼 땅이었을까. 예비된 하늘의 뜻을 거역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혹은 주워진 운명에 순응하는 소극적인 동양 사상의 틀 때문인가.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 모든 일은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대자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되도록 결정지어 있다는 예정론적 사고방식, 그 운명론.



서역의 아유타 국 공주는 천신이 점지한 인연 따라 강 깊고 산 높아 험한 육로로는 엄두도 못 낼 아득히 먼 여로에 올랐다. 무려 석 달여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거친 뱃길 노 저어 당도한 해동(海東) 땅 가락국. 신탁의 예언보다 더 지중한 상제(上帝)의 명 받들어 열여섯 나이에 배필 찾아 양친을 떠나온 수로왕비 허황옥. 그녀의 능 앞에 서니 물경 2천 년 전 붉은 돛에 붉은 깃발 휘날리며 인도양의 계절풍 따라 파도 거센 물길 헤쳐온 한 척 배가 환영으로 뜬다. 바람결 꽤나 맵싸한 시월. 기갈 센 낙동강 바람이 김해 들녘 가로지르면서도 세(勢) 늦추지 않은 채 마구 치달리는 한낮이다.


김해 박물관이 주최하는 역사강좌 내용이 호기심을 끌어 취향이 같은 지인과 동행한 걸음, 구지봉 아랫마을에 닿았을 때는 강의시간까지 여분의 공간이 널찍했다. 점심 한 끼쯤 거르더라도 인근 유적지를 돌아보자는 내 제안에 그녀는 마다하지 않고 앞장을 서주었다. 이미 그야 몇 차례 와봤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정기가 뛰어난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구지봉. 나지막한 동산에는 소나무만 숲을 이루었을 뿐 띠풀조차 자라지 않은 메마른 황토가 맨살 드러낸 채 흙바람을 일궈댔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구지봉에 올라보니 금합 속의 황금알 여섯 개,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으로 화(化) 한 수로가 가락국을 세우니 서기 42년의 일이다. 남해안 일원에서 세력을 늘려가며 고유의 문화를 일궈온 가야. 하나 삼국사기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삼국유사에 가락국 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그 족적이 약간 비칠 따름이다. 일연 스님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김해는 당시 금주(金州)라 불렸고 낯선 외방 종교인 불교는 상교(象敎)로 일컬어졌으며 파사석탑은 모난 사면의 5층 탑으로 조각이 기묘하다고 적혀있다. 하건만 여전히 미답의 역사 저편 풀리지 않는 비밀 기호로 남아있는 왕국, 가야.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요즘이라 구지봉 흙먼지 이는 산바람에 떼밀리다시피 하여 닿은 수로왕비 능. 결 고른 잔디 아래 둥근 봉분으로 남아있는 허 왕후는 이제 아련한 전설일 뿐이다. 그보다는 능 앞, 파사석탑을 안치시킨 파사각(婆娑閣)이 한층 더 가락국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끌로 다듬어 귀 맞춘 탑의 전형은 가늠마저 어려울 만치 마모가 극심한 파사석탑. 그저 둥글넓적한 돌덩이 몇을 층층이 올려놓은 형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석질이 아니라는 연질(軟質)의 돌 표면에 나있는 엷은 자주 색조 무늬가 독특하다.



오백 년에 이르던 가야 왕조의 치세 역사는 간데없어지고 단지 몇 문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연 스님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왔다'라고 간략히 썼을 뿐이다. 파사석탑의 돌에서는 붉은색이 돌고 석질이 무르며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돌이라는 것은 이미 과학적 분석 결과로 알려져 있다.


파사석탑을 안치시킨 파사각(婆娑閣)이 한층 더 가락국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끌로 다듬어 귀 맞춘 탑의 전형은 가늠마저 어려울 만치 마모가 극심한 파사석탑. 그저 둥글넓적한 돌덩이 몇을 층층이 올려놓은 형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석질이 아니라는 연질(軟質)의 돌 표면에 나있는 엷은 자주 색조 무늬가 독특하다. 엽락석 성분의 사암은 동남아시아에서만 산출되는 암석이라고 한다.

여태껏 파사석탑으로만 알아왔던 이 탑이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도 불린다는 사실은 안내문을 읽다 얻은 수확이다. 바람을 진압시키는 탑, 풍파를 제압할 수 있는 특별한 탑이란 얘기다. 공주를 태운 배가 아유타국 뒤로하고 얼마쯤 항진하다 성난 파도 만나 되돌아오자 부왕이 해신을 다스려줄 영험한 돌탑을 배에 실어주니 그 탑이 곧 진풍탑. 항해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대양 한가운데에서는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거나 돌풍에 휘말려 해난사고가 일어나는데 하물며 그 옛날임에랴. 거친 풍랑 속에서 평형석 역할을 해준 탑의 수호로 무사히 김해 앞바다 망산도에 닿아 하늘이 정한 대로 수로왕과 합혼 하여 가락국을 융성시킨 허황옥.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비로 허황후라고도 칭해진 왕비는 아유타국의 공주였다. 아유타국에 대해서는 히말라야 산맥 아래 인도라고도 하고 중국 쓰촨 성에 있다고도 하고 메콩강 유역의 동남아 어느 부족국이라는 등 아직도 의견 분분하다. 공주는 수로왕과의 사이에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열명을 두었는데 두 명에게는 허 씨 성을 내린다. 허황옥은 김해김 씨는 물론 김해허 씨의 명실상부한 시조모이다. 왕비능에 잠든 허황후는 그럼에도 여전히 설화 속 허구냐, 실존인물이냐를 놓고 뭇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단군에 대한 의식이 그러하듯 이 또한 못내 씁쓸한 일이다.


벚꽃 분분히 지던 어느 해 봄. 수로왕의 납릉(納陵) 정문에서 별스런 코끼리 상이며 쌍어문(雙魚紋) 조각을 둘러보고는 낯선 남방 문물을 들여온 허왕후의 능도 찾고 싶었으나 시간의 제약 탓에 아쉬움 남긴 채 훗날로 미뤄온 터였다. 김해는 부산과는 바로 지척 거리. 마음만 먹으면 쉬이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이건만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하고 어언 이십 수년이 흘러갔다. 오래전부터 별러온 왕비 능 답사, 특히 능역(陵域) 내에 있다는 파사석탑의 신비로운 설화가 나를 강하게 유혹했으나 이제껏 그곳과는 연(緣)이 닿지를 않았던 셈이다.



오래전 기억으론 산자락 제법 올라야 만날 수 있었던 수로왕비 능이다. 노송 둘러섰고 띠풀 시원치 않아 황토흙 날리던 그 수로왕비 능 인근 길도 유택도 다 변했다. 홍살문 바로 앞이 주차장으로 지금은 평지에서 몇 발짝만 걸어 들어가면 바로 경내가 된다. 왕비 능은 경사도 완만한 산기슭에 앉아있다. 옆에서 보면 비탈의 기울기가 확연히 드러난다. 파사석탑은 잔디 고른 능 오른쪽 아래에 정좌해 있었다.


무릇 모든 만남에는 시절 인연이 따로 있게 마련. 하루속히 만나고자 조바심친다 해서 빨리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며 진정 만나기 싫은 일일지라도 만날 인연이라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사람과의 만남이든 사물과의 만남이든 예사로운 마주침인 것 같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진작에 신이 치밀히 짜놓은 각본에 의한 연출. 따라서 아무런 의미나 까닭 없이 만나지는 게 아니다.


그리도 보고 싶던 파사석탑과 내가 지금 해후하게 된 것은 왜일까. 바람 때문이다. 예기치 않게 일고 있는 가슴속 격렬한 바람 때문이다. 자제할 수없이 막무가내로 소용돌이치는 바람. 미묘한 내면의 동요를 누군가 눈치챘음인가. 내 안에서 나를 송두리째 휘감고 있는 바람을 다스리라는 무언의 계시 같다. 나는 줄곧 심지 굳은 바위인 줄 알았다. 탄탄히 뿌리내린 튼실한 나무인 줄 알았다. 웬만한 폭풍쯤엔 끄떡도 않는 의연함이 응당 내 몫이려니 했음은 얼마나 가당찮은 착각이었는지.


어쩌면 나는 한겨울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바람을 기다려온 마른 가랑잎. 미세한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는 마른 잎새였다. 오히려 내 편에서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며 일탈을 소망해 온 민들레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작은 불씨에도 금시 타버리고 마는 위태로운 인화성 그 자체였다. 포르르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낯선 허공을 유영할 기대에만 골똘해온 한심토록 가볍디가벼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형편없는 존재였다.


자유로운 바람을 꿈꾸며 그보다는 바람을 갈구하며 바람처럼 살고자 한 나였다. 하나 나는 바람에 휩싸인 가랑잎, 중심을 잃고 휘청이게 하는 바람이 자꾸만 두렵게 느껴진다. 내 안에서 수시로 나를 흔드는 바람에 겁을 먹은 것이다. 이제 바람을 잠재울 진풍탑 하나 내 가슴에 들여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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