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서귀포 원도심에 사는 주민들은 전생에 복덕 후하게 쌓았지 싶네요.
굳이 먼 걸음 할 필요조차 없이 중앙 도심에서 도보로 십여분 안팎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명소와 공원이 즐비하니까요.
산책 삼아 거닐만한 곳들은 거개가 하영 올레길과도 겹쳐진답니다.
정방사 법장사 풍경소리에 젖어보기도 하고 면형의 집 피정센터에서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지요.
매일올레시장과 이중섭거리를 설렁설렁 돌아다니다 올 수도 있고요.
가벼운 재킷 차림에 폰 하나 들고 천지연이나 정방폭포 힘찬 물줄기 여유롭게 들러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지 않나요.
서귀포 칠십리 아름다운 바다를 눈 아래 가득 펼쳐두고 자구리해안 앞마당 삼아 해풍 즐기니 매일이 신선놀음이지요.
뒤쪽으로 시선 돌리면 중심축 굳건한 한라산이 안개와 구름 더불어 의연한 풍모로 자리를 지킵니다.
옛부터 최고로 치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이렇듯 서귀포 시가지는 살풋 깃든 셈이지요.
오늘은 서귀포 도심올레길인 하영올레 3코스를 한꺼번에 다 돌기로 했어요.
초추의 청명한 구월 주말, 서귀포 시청에서 하영올레 걷기 축제가 열렸답니다.
백로(白露)도 지났으니 햇살 따가워도 조석으로 바람 선들거리는데요.
흰 이슬이란 글자처럼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잖아요.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는 시기이나 기승부리는 늦더위 햇살 덕에 알곡이 충실해지고 과일은 단맛을 더하게 된다지요.
저녁이면 여울지는 풀벌레 소리, 옛사람들이 ‘절기는 속이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던 대로네요.
아침에 현관문을 여니 명징한 얼굴을 한 한라산이 바짝 다가서더군요.
날씨는 더없이 쾌청, 하영올레 걷는 날인데 바람까지 시원하니 그야말로 안성맞춤.
하영은 ‘많다’를 의미하는 제주어로 기존의 올레길을 조합해 만든 하영 올레.
하영올레길은 서귀포시 원도심을 걷는 길이지요.
세 코스로 나누어졌는데 오래된 골목과 전통시장길을 누비다 보면 호젓한 숲길이 나오기도 하고 유명 폭포를 마주하게도 되지요.
행사 전의 식순은 스트레칭 정도의 관절 풀기 운동이라면 모를까 그 밖의 것들은 늘 그렇듯 사족에 해당하건만.
시청 행사이므로 시장님 참석은 당연하나, 행사와 별 관계없는 여타 지역 유지들과 국회의원은 빠지지 않고 한 말쌈들.
그런 구태는 언제나 사라져, 시민들 격의 없이 자유롭게 즐기는 진정한 축제의 장 마련될는지.
세 코스 완주 후 받을 수 있는 선물인 간세인형 욕심으로 우리는 땡볕 마다치 않고 완주를 하기로 했지요.
역시나 제멋에 취해서든 걷는 게 좋아서든, 그냥 걸을 때와 달리 숙제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흥미 반감.
직업적인 일과 취미생활의 차이, '얽매임과 자유선택'으로 갈리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데요.
간세 열쇠고리 손에 넣어봤자 애들처럼 매달고 다닐 거도 아니면서 추하게 노탐을 부렸더군요. ㅎ
어쩌겠어요, 미혹한 중생이니.
하긴 세 코스 다 섭렵해도 전체 22.8km 거리이니 그쯤이야 거뜬하다 싶어 도반과 하이파이브하고는 출발~.
오후녘 새연교에서 낙조를 보려고 1코스를 맨 나중에 걷기로 하고 3코스부터 시작했지요.
처음 걷는 분들이나 걷기에 단련이 안 된 분들은 하루 한 코스씩 설렁설렁 걸으면서 서귀포의 매력에 빠져보세요.
간세 한 마리 데려오려고 나처럼 하영올레길 한꺼번에 후다닥 걷지 말고요.
꼬닥꼬닥 걷는 게 원래 올레길 걷기 맞아요.
오늘처럼 경보대회하듯 휘리릭 재빨리 걷는 건 올레길에 대한 결례였어요.
<하영올레 3코스>
서귀포 도심올레길인 하영올레 3코스는 하영올레길 중 몇 차례 다녀봤어도 여전히 싫증 나지 않는 코스가 여기였어요.
서귀포시청이 제공하는 백팩과 생수를 챙기고는 제1청사에서 출발해 솜반천 탐방로를 걷는데 지난여름 폭우 속에서 이 코스를 걸어봤기에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더라고요.
솜반천 지나 흙담소나무길에 들어서니 흙길에 그늘길이 한동안 이어져 걷기엔 최고였어요.
홍로마을 지세가 화로 모양이라 불이 자주 난다며 흙담 쌓아 그 위에 심은 백 년도 더 된 해송.
운치 있는 기품으로 마을을 수호해 준 흙담 소나무는 도시가 팽창하면서 학교 담벼락 사이로 옹색하게 밀려났더군요.
다음에 찾은 곳은 앞 내 먼나무, 뿌리내린 자리가 자리인만치 볼 때마다 안쓰러워요.
지금은 녹음 짙지만 머잖아 새빨간 열매 매달릴 먼나무는 두꺼운 잎 반질거리는 감탕나무과의 상록교목이지요.
국내에서 가장 큰 먼나무로 현재 도로 한복판에 엉거주춤 서있지만, 붉은 열매 꽃처럼 달고 소담한 자태로 군림할 때면 아주 볼만해요.
먼나무 옆에는 서홍동에서 태어나 타계할 때까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제주의 자연을 화폭에 담았던 변시지 화백의 자취가 서린 작은 공원이 기다리는 데요.
고향땅에 터 잡은 변시지 그림정원을 거쳐 서귀포에서 가장 오래된 홍로마을 지나면 어느 결에 지장샘.
이 샘은 1987년 한국자연보호협회가 선정한 '한국의 명수 100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된 용천수로 주민들의 식수였다네요.
물이 맑고 시원한 데다 아무리 가뭄이 들거나 큰 비가 내려도 그 양이 항상 그대로 유지된다니 최상의 명수(明水)겠지요.
지장샘 자리에는 물이 솟는 곳을 보호하고자 전각을 세우고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더군요.
지장샘이 흘러내리는 물꼬에는 일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 산들거리며 노닐었지요.
샘터 앞에 하영올레 산뜻한 참꽃색 간세가 기다리기에 첫 번째로 스탬프를 찍었네요.
면형의 집에선 십자가의 길까지 꼼꼼히 둘러봤는데요.
수령 250년생이라는 노거수 녹나무 언제 봐도 장관이지만 녹음 깊어 더더욱 위엄차 보였고요.
제주 최초의 온주밀감나무 고사목은 앙상하나마 '홍로의 맥'으로 부활했더군요.
산지물 물놀이장으로 내려서 동흥천 천변 걷노라니 먼나무 줄지어 서있었고 수국 포기 마른 꽃 달고 있데요.
이음길 힐링길 경쾌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시청 넘어가는 언덕길.
자투리 시간이면 아무 때나 걷던 손금처럼 빤할 정도로 스스럼없는 우리 동네 길이 가까워졌네요.
<하영올레 2코스>
서귀포 시청에서 원도심 거쳐 정모시공원과 서복전시관 들렀다가 이중섭거리로 해서 서귀포 시청으로 돌아오는 코스인데요.
아시아 CGI 애니메이션센터까지는 심심할 정도로 평이한 마을 뒷골목이 이어지는데요.
서귀포 구도심 골목길은 고만고만한 집들이 한동안 나타나는데 그나마 벽화가 그려져 반짝, 표정 산뜻해지긴 했어요.
태평근린공원에는 성급히 가을 기별 이르러, 벚나무 낙엽 깔린 길은 조용히 걸었습니다.
다시 동네가 나서며 주공아파트 단지가 무뚝뚝하게 맞아주자요.
언덕에 의지한 무량정사 지나 정방사 아랫길로 뚜벅뚜벅 접어들면 그제사 물길 맑은 정모시 쉼터가 나오고요.
신 동국여지승람에는 정방폭포를 정모연(正毛淵)이라 기록돼 있다더니 정모시는 정방폭포 상류에 자리한 산물터.
사시사철 맑은 용천수 솟아 넉넉한 물길 이룬 정모시 쉼터엔 벤치와 운동 시설 등 잘 갖춰졌고 조경도 짜임새 있고요.
정모시 하류로 내려와 높다란 다리 아래로 난 징검다리 건너 언덕 오르면 서복 불로초공원에 닿는데요.
도대체 어떤 작자가 정방폭포 이 절경지에 하필이면 서복이란 중국인 기리는 이딴 걸 거창스레 만들었는지?
정방폭포 이마에 '왔다 가노라' 서복이 새겨놓았다는 석벽의 글씨체가 그리 대단하나요?
굴종적인 문화 사대주의인지 암튼 정말 꼴불견인 대형 서복전시관에 딸린 불로초 공원인데요.
두드러진 중국풍에 안 그래도 거부감이 들며 불쾌했던 서복 전시관이라 스탬프만 찍고 그냥 패스했네요.
으스대며 뻐기는 전시관 완고한 담벼락 아래 소낭머리 안내판 초라하기 그지없더군요.
자구리해안은 만조로 물 가득했고 자구리공원은 그나마 분위기 평화로웠습니다.
일본 동경 문화학원 재학 시절 미술과 선배이자 천재화가로 소문난 미남 유학생 이중섭과 사랑에 빠진 일본 처녀 마사코.
1945년 현해탄을 건너와 함경도 원산에서 이중섭과 전통혼례를 치렀으며 이때 이남덕이란 이름을 신랑이 신부에게 선물했다지요.
한국동란이 터지자 온 가족이 피난을 와 서귀포 언덕배기 반장집에서 네 식구는 한 칸 남짓한 셋방에 얹혀살았는데요.
이 방에서 복닥거리며 자구리해변에 나가 게를 잡고 한라산 발치에서 나무새 뜯어 식량 삼아야 했던 곤궁한 생활을 했지요.
훗날 이중섭의 그림에서 게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 게를 많이 잡아먹어 미안한 심정에서 그리게 됐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시난고난 비칠거리자 그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지요.
해방 후 한일 간 국교단절이 된 데다 전쟁통의 혼란기라 이중섭은 함께 갈 수가 없었던 거지요.
푸른 물결은 지침 없이 바다 넘나들며 서귀포와 일본을 오가건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리운 가족들 꿈길에서나 만날뿐.
젊은 아빠인 그는 마지막까지 가족과 다시 해후할 그날만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서울의 한 병실에서 홀로 눈을 감고 말았지요.
바닷가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살며 은박지일망정 그림도 맘껏 그렸으니 그에게는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였을 겁니다.
공연히 추연한 기분이 들어 한참을 바닷물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영올레 1코스>
서귀포시청 제1청사-법장사골목길-걸매생태공원-천지연폭포- 칠십리시공원-새연교-새섬공원-천지연기정길-제주올레여행자센터-아랑조을거리-서귀포시청 제1청사로 돌아오는 길이지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장소인 걸매생태공원과 칠십리시공원이 포함되고 먹거리 즐비한 아랑조을거리를 잇는 1코스.
걸매생태공원은 자연과 생태를 테마로 꾸민 코스답게 산책로 아래 흐르는 하천에 오리 떼 노닐고 가끔 백로도 기웃거렸고요.
가끔 아이들이 뜰채들고 고기잡는 걸 보면 아마 여기에도 버들치가 사는 모양입니다.
공원 가로질러 매화원 옆길로 들자 매화나무 어느새 단풍 들기 시작하더군요.
추억의 숲길 약간 후미진 언덕일랑 재빠르게 통과해 큰길로 나서면 건너편이 연외천.
저 아래 물길 힘차게 치달려 천지연폭포로 빠르게 흘러내렸어요.
그렇듯 서귀포 칠십리 시공원은 천지연폭포 서남쪽 언덕을 끼고 조성되었답니다.
칠십리 시공원에 오르며 칠십리라는 말이 아마도 서귀포 해안선의 길이가 아니겠나 싶었어요.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곱다느니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진다는 노래 가사도 있다시피 바닷가 풍광과 연관됐잖아요.
그러나 검색 결과 해안선 길이가 아니었네요.
서귀포 칠십리(西歸浦 七十里)란 조선시대 당시 현청이 있던 표선 성읍 관문에서 서귀포 포구까지의 거리라네요.
지금은 신비로운 서귀포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상징어로 통하지요.
칠십리 시공원 시비에 새겨진 시어 음미하며 걷다 보면 자연스레 작가의 산책길과 연결되는데요.
호젓한 작가의 산책길 지나 천지연 기정길 언덕을 내려오면 왼쪽엔 서귀포 포구, 오른쪽으론 천지연 폭포 가는 길이 나선답니다.
하늘 천, 따 지, 못 연, 하늘과 땅이 만나서 이룬 연못이 천지연이라지요.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굉음 우렁찬 그 아래 움푹 팬 소(沼)는 깊고 너르게 펼쳐졌네요.
까마득한 일월 저편인 40만 년 전 분출된 용암층에 침식작용이 거듭되며 깎이고 파여 깊숙해진 계곡.
수직으로 깎아지른 석벽에는 갖가지 식물 어우러져 무성한 숲을 이루었지요.
천연기념물 제379호로 아열대성·난대성의 각종 상록수와 양치식물 등이 울창한 계곡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이래요.
인근이 모두 '세계 7대 자연경관'과 '생물권 보존지역'이며 '세계지질 공원'에 선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천지연 폭포에서 나와 남성중로를 따라오다 보면 서귀 포구에 늘어선 어선들과 유람선이 보입니다.
우측 저만치에는 새섬과 연결된 새연교 부풀린 요트의 돛폭같은 교각이 시원스레 드러나고요.
새연교로 곧장 내닫지 말고 서쪽 해안가 절벽을 바라볼라치면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날 겁니다.
절벽에서 쏟아져 내려 어수선하게 깔려있는 바위더미들은 지상에서 서귀포층을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래요.
천연기념물인 먼먼 신생대 흔적으로, 절벽 아래 산재해 있는 서귀포층 패류 화석 공원도 유념할만한 볼거리인 거죠.
두터운 바위에 가리비며 대형 조개 같은 패류가 켜켜이 쌓여있는 걸 육안으로도 쉽게 관찰할 수 있어요.
용암과 함께 굳어진 조개류가 바윗돌에 묻혀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일면 아이러니랄까요.
이 서귀포층은 고대 해양환경을 가늠해 보는 주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지만요.
제주는 대부분 현무암으로 구성된 지표라 비가 내려도 곧장 바위틈으로 스며들잖아요.
하지만 빗물이 용암과 조밀한 서귀포층 사이에 갇히게 된다는 데요.
백 미터 두께의 서귀포층은 빗물을 모아두는 수조 역할을 하기에 지금 우리가 용천수 만나고 삼다수를 마실 수 있다네요.
서귀포층은 이처럼 지질학적으로 대단히 유의미한 가치를 지니고 있답니다.
이번엔 연륙교인 새연교를 건넙니다.
날렵한 맵시로 새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이지요.
요즘은 새섬 환경정비사업으로 출입금지라, 새연교에 서서 노을을 기다립니다.
서쪽 저만치 범섬이 보이고 법환포구도 아물아물 드러납니다.
새연교는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일몰 명소인데요.
범섬 너머 바다로 지는 황홀한 해넘이를 보러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새연교랍니다.
세연교를 내려와 서귀포 어판장 지나 서문길로 해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앞을 스쳐서요.
아랑조을거리로 빠져나가거나 자구리해안 거쳐 이중섭거리로도 올라가고요.
자유로이 이 골목 저 골목 들쑤시며 앞마당같이 훤한 길 누비다 보면 집 앞에 다다릅니다.
이처럼 하영올레 1코스부터 3코스까지는 내 손바닥에 그려져 있소이다, 랍니다.
종심의 중허리도 넘은 이제, 삶의 보너스로 안겨진 서귀포 생활은 그래서 나날이 은총이자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