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이파리 물들기 시작하는 구월 말, LA 파사데나에 위치한 Norton Simon Museum을 찾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술애호가로 유명한 노턴 사이먼이 삼십 년에 걸쳐 컬렉션 한 14세기~20세기 유럽 미술품과 아시아 각국의 불상과 조각품들이 전시된 미술관이다. 렘브란트, 고야, 피카소의 회화를 비롯 드가와 로댕, 헨리무어의 조각 및 인도, 파키스탄, 네팔, 캄보디아, 태국 등지에서 모은 불상 등 일만이천여 점의 소장품이 있다. 르네상스부터 금세기에 이르기까지의 회화와 조각이 시대별 지역별로 분류되어 일층에 전시되어 있고, 지하층에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미술관 입구에서 맞아주는 '칼레의 시민'은 파리 로댕 미술관은 물론이고 필라 로댕미술관에서 본 것과 꼭 같다. 해서 항간에 모작설이 떠도는데 이는 로댕이 직접 제작한 거푸집으로 열두 개의 조각품을 더 만든 것 중의 하나란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로비 중앙에 두 팔을 잃은 석존이 무표정하게 서서 마중한다. 어느 호젓한 산사 풍경소리를 그리워하는 눈치다. 그 눈빛을 외면하고 얼른 오른쪽 방으로 들어간다. 초기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에서부터 바로크를 대표하는 명작들과 20세기 모더니즘의 중요 작품들이 한자리에 망라된 일층 전시공간. 특히 '무희' 그림으로 잘 알려진 드가의 다양한 소품 조각과 헨리무어의 조각을 집중적으로 컬렉션 했다.
일층 전시실 규모도 대단하지만 더욱 입이 벌어진 곳은 아래층 전시실이었다.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컬렉션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특히 1~4세기 쿠산왕조와 4~6세기 굽타왕조 시대의 기념비적인 석상을 비롯해 남부 인도의 촐라 청동상 등등 인도를 아예 통째로 들어다 놓은 듯 양적으로 어마어마했다. 89년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배 당시 수탈당한 인도 문화재들이 돌고 돌아 지금은 미국땅 캘리포니아 미술관 좌대에 올려진 채 생뚱스런 얼굴로 하염없이 서있었다. 거개가 신체 어느 한 귀퉁이 깨어지고 이지러진 채다.
미술관 지하와 언발란스이기는 티베트 불화인 탕카도 매일반이었다. 티베트 역사와 문화를 유추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탕카라 한다. 티베트 특유의 불교사상과 정신세계가 집약돼 있는 불화 역시 흙벽 대신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대리석 벽에 어정쩡하게 걸려있다. 금박물감 찍고 찍어 아무리 화엄성중 찬탄한대도 깊은 되울림 들리잖고, 아무리 석상을 쪼아가며 영혼을 불어넣었다 해도 염화시중의 미소는 진작에 잊혔다. 이 세상 어느 것이건 제빛을 발하려면 있어야 할 본디 자리에 있어야 함이니. 다행히 한국에서 건너온 유물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노턴 사이먼 미술관 아래층 로비에서 쉬면서 다리를 주므르다가 문득 간송 미술관 생각이 났다. 매년 봄과 가을이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기는데, 어느 해 한국에 나갔다가 그 줄에 서게 되는 행운이 따랐다. 그렇게 한국 고유의 미와 혼을 지켜낸 간송의 생애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았다. 현재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을 우리 땅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의 덕이다. 거간꾼이 천 원을 요구했지만 그는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만원을 더 주고 해례본을 구입하였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가격이 천 원이라는 경제적 가치보다 유념해야 할 점은, 문화말살 정책으로 조선어 교육금지령이 내려진 1940년대 초이니 훈민정음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다. 훗날 한국전쟁 때는 직접 품에 안고 피난을 갔다는 일화도 있다.
약체국이 겪는 불행은 어느 나라나 같아서 조선에 총독부를 둔 일본인들은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들을 도굴하거나 약탈하여 본국으로 빼돌렸다. 그 당시 간송 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 즉 보물을 모아놓는 집이라는 뜻대로 간송 전형필선생은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 문화재의 해외유출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미술품을 매입해 나갔다. 우리 문화를 지키는 것이 민족혼을 수호하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그는 앞장서 문화지킴이가 되었던 것. 눈이 익은 훈민정음해례본, 고려청자 천학매병,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의 그림과 혜원 단원의 그림,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고려시대의 석탑과 같은 우리의 대표급 문화재들을 그때 그는 사 모았다. 이처럼 간송이 수준 높은 안목으로 수집하고 지켜낸 민족의 유산들은 서화, 고서, 도자기, 불상 등 방대한 양으로 국보만 해도 12점, 보물은 10점에 이른다.
대대로 종로 부호인 거부 집안에서 태어난 간송. 일본 유학을 마친 후 일제 핍박 하에 있는 조선의 청년으로서 식민 조국에 번민하던 젊은이에서 애국의 길을 찾게 되는 계기가 어느 날 온다. 평생의 스승인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선생을 만남으로 소장의 나이에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깨닫게 된 간송. 오세창 선생은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며 언젠가 독립을 하게 될 거고 그때를 위해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는 우리 문화재를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간송은 20대 후반부터 일본으로 넘어가는 문화유물을 앞장서서 수집하기 시작, 그 덕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지켜져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보존시킨 문화유산들 중에서도 조선시대 서화야말로 조선의 문화와 역량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문화사적 귀한 지료로 평가되고 있다.
편법도 마다하지 않고 재산을 자식에게 더 많이 물려주려 안달인 재벌들이 세금감면의 목적으로, 자산투자의 방편으로 운영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이 산재해 있는 이즈음. 또 다른 면모의 독립지사적 자세로,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문화재를 지켜내 후대에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고 북돋아 안겨준 그는 진정한 선각자였다. 부유층 개인의 수집 취미로만 끝날 수 있는 골동품이나 미술품 수집이 이처럼 애국적 행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일제식민지였던 숨막히는 시기, 다사다난했던 근현대를 살아내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헌신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정신과 업적이 여기 와서 더욱 돋보였다. 역시 간곡한 심정으로 바쳐지는 외곬 사랑은 아름다운 것.
문화재의 가치는 국가의 가치와 비례한다고 하였던가. 그가 지켜낸 것은 그저 전통예술품이 아닌 우리의 민족문화, 민족얼과 혼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예술작품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예술가의 손에서, 또 한 번은 그것을 느끼고 향유하는 사람, 즉 감상자나 컬렉터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라고 한 그대로다. 미술관 나들이에서 이처럼 가끔 약소국의 비애를 곱씹게 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실에서의 떨떠름한 기분을 풀 겸 후원으로 나왔다. 수목과 조각품이 조화롭개 배치된 정원이며 유려한 곡선의 연못은 세간사 어지러움과 달리 퍽 아늑하니 평화로웠다. 동양풍에 맞춘 듯 불상을 감싼 대밭에서 바람 따라 서걱대는 대나무 소리가 들렸다. 수련이 담뿍 담긴 연못 가장자리에는 아이리스 무성해 명년 봄에 다시와 연보라 아이리스가 핀 모네의 정원을 구경해야지 작정했다.
1922년 창립된 패서디나 예술원(Pasadena Art Institute)으로 시작되어 1969년 새 건물을 짓고 패서디나 미술관(Pasadena Art Museum)을 개관해 이때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앤디 워홀(Andy Warhol) 등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다수 확보했다. 1974년 경영난으로 폐관 직전에 이르자 다국적 기업을 운영한 사업가 노턴 사이먼이 인수해 패서디나 미술관 전시품과 자신의 소장품을 통합하여 1975년 Norton Simon Museum으로 재개관하였다. 유대계인 노턴 사이먼은 식품(Hunt's), 음료(Canada Dry), 출판(McCall Publishing), 화장품(Max Factor), 렌터카(Avis) 회사를 운영한 기업가였다. 뜬금없이 '사랑은 아름다워라' 노래가 배경으로 스며든 이유는 뭘까?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모정>이란 영화로 우리와도 친근한 은막스타 제니퍼 죤스는 노턴 사이먼과 1973년 재혼했다. 치파오가 장만옥만큼이나 잘 어울리던 영화 속의 그녀. 93년 사이먼 사후에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이 미술관 재단이사회 회장을 지냈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