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이 열리던 신년 벽두에 우리는 미국으로 향했다.
결혼한 아들을 제외한 세 가족이 그렇게 미 동부 뉴저지에 닻을 내렸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유학 비자로 온 딸내미였으나 제반 여건이 녹록지 않아 당분간 세 식구가 함께 일을 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우리 경제 사정으로는 고액의 등록금 주선이 여의치 않아서였다.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이민 초기, 비즈니스 하나를 인수하기에도 자금 빠듯했던 터라 계산상 석사과정 내내의 학비 조달은 언감생심이었다.
뉴욕대 대학원 등록금 액수는 한국에서 국립대학 내용만 아는 내 수준으로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고등학교 다닐 적 두 아이에게 주문하길, 첫째 국립대 진학 / 둘째 재수 불가를 주지 시켜왔다.
둘 다 국립대를 다녔고 딸내미는 줄곧 장학생이었다.
실제 90년대 한국 국립대 등록금이랬자 고작 몇 십만 원이었는데 뉴욕 대학원 학비 등은 당시 6만 불 가까웠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딸내미는 어쩔 수 없이 붙잡혀 세탁소 일을 도와야 했다.
영어가 젬병인 우리 대신 미국에서 영어 연수를 받은 바 있는 딸내미라 형편상 생활 최전선에 서게 됐던 것.
그렇게 엉겁결에 딸이 앞장서서 이끈 가게는 일 년 안 돼 매상이 배로 뛰었다,
고지식할 정도로 성의껏 최선을 다하니 그 진심이 고객을 감동케 해 입소문이 퍼진 결과였다.
미국인들 성격은 대개가 솔직하고 단순하며 무엇보다 꾸밈이나 거짓 없는 진실 앞에 마음을 활짝 연다.
과묵한 편인 딸내미는 심지가 곧고 깊어 불만족스러운 상황임에도 한마디 불평 없이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유학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딸은 일단 가까운 커뮤니티 칼리지에 적을 두고 영어 실력 또한 튼실히 다져나갔다.
대학 2학년 때 중의학으로 전과하겠다며 중국 유학을 준비하기도 한 딸은 독학으로 중국어도 마스터한 터였다.
아직 젊어서인지, 그만큼 어학 쪽에 뛰어난 능력이 있는지, 일취월장하는 딸내미와 달리 영어라면 주눅부터 들어 버벅대는 나.
지금도 엠지세대를 엠제트 세대라 발음할 거 같은 데다 딱딱하게 굳을 대로 굳은 악센트 교정이 쉽질 않았다.
내가 펜실베이니아,라고 이웃 동네를 거론해 봤자 그 발음 옳게 알아듣는 미국인은 도통 없었으니까.
영어 발음 문제로 겪은 에피소드와 애로점은 책 한 권으로 엮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아무튼 당시 우리는 프런트를 카페처럼 plant로 가꾸고 상시 세미클래식 채널을 틀어놓았다.
일을 하다 지쳐 기분전환이 필요하면 딸내미는 <캘리포니아 드리밍> 혹은 <호텔 캘리포니아> 테이프를 눌렀다.
한국에서부터 홍콩 감독 왕가위 팬으로 <중경삼림>이며 <타락천사>와 <아비정전>을 아꼈던 딸이다.
대학 다닐 때 다들 가는 유럽은 마다하고 외국여행이라고는 홍콩을 세 번씩이나 갈 정도로 왕가위에 심취했던 딸내미.
오죽하면 딸은 그때 조선일보 블로거로 표제가 왕가위, 주제도 왕가위 영화 일색인 요즘 말로 왕가위 덕후인 파워 블로거였다.
딸로 인해 나도 덩달아 왕가위 영화를 두루 섭렵했는데 내 취향은 <해피투게더>와 <화양연화>였고.
왕가위 감독 초기 영화인 <중경삼림>의 OST였던 California Dreamin.
60년대 노래가 사십 년 후 뉴저지에서 자주 소환됐던 사연이다.
동시에 70년대 말 발표된 노래가 90년대 들어 역대 최고의 기타 솔로곡으로 격찬받은 <호텔 캘리포니아>를 딸은 번갈아 듣곤 했다.
오래 꿈꾸면 마침내 이루어진다던가.
이듬해 봄 딸내미는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하고자 필라 공항에서 생판 낯선 캘리로 혈혈단신 떠났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사막에 푸른 씨앗을 심고 착실하게 가꿔 알찬 결실을 맺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덕에 우린 동서양 의학을 전공한 애들 덕에 좌청룡 우백호 부모란 소릴 듣게도 되었고.
*<호텔 캘리포니아는 어디에?>란 제하로 올린 어느 포스팅의 음악을 듣다가 옛 생각이 나서 중언부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