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나의 서울역인 유니온스테이션 주변
by
무량화
Sep 15. 2024
아래로
시골 영감 기차 타고 서울간다듯 촌사람 한 번씩 가는 유니언 스테이션은 나의 서울역이다.
애들이 오지 않는 주말이면 일단 기차를 타고 본다.
메트로링크와 암트랙, 지하철, 버스 노선까지 망라된 교통의 요지로 여기서 전국을 잇는 기차를 타도 된다.
1939년에 건축된 역사는 교회 양식을 본뜬 스페인 스타일로 외벽과 실내 전면이 대리석으로 꾸며져 단정한 인상을 준다.
이번엔 기차역 안팎과 건너편 올베라 거리에 있는 벽화를 찾아볼 계획.
El Pueblo de Los Angeles Historical Monument에 속해 있는 올베라 스트리트는
LA가 처음 탄생하게 된 곳으로 LA에서 가장 오래된 집과 1815년 LA 초기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Olvera Street에 있는 멕시코 아티스트인 David Alfaro Siqueiros의 일부 복원된 벽화를 만나러 가려고 나선 이번 여정.
항상 성급하게 빠져나가곤 했던 역사를 아주 꼼꼼히 둘러보는 걸로 일단 하루 나들이는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유니언 역사 건너편, 홈리스들이 진을 친 공원 안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동상을 뒤로하고 큰길을 건넜다.
1771년 프린치스코회 수도사 후니 페로 세라는 이 지역에 미션 샌 가브리엘 미션을 세우고 전도를 시작했다.
이십 년 후인 1791년 샌 가브리엘 미션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인 신부와 마흔네 명이라는 작은 집단이 이주해 와 '엘푸에브로 데 뉴에스트라’라는 마을을 만들었다.
이처럼 열한 가족이 올베라 스트리트의 남서쪽에 위치한 Los Angeles River 근처에 정착하면서 로스앤젤레스의 역사는 출발된 셈이다.
LA가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샌 가브리엘 미션의 당시 이름이 ‘아크 에인절’이었기 때문.
올베라라는 지역명은 영어 구사가 힘든 멕시코인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한 멕시코인 최초의 LA 카운티 판사 어거스틴 올베라의 이름을 기리고자 1877년 개칭되었다.
지진 피해로 무너진 마을은 멕시코의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 크리스틴 스털링의 주도하에 재건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좁은 골목 양켠에는 멕시코 풍 전통가게들과 마리아치 음악 울려 퍼지는 멕시컨 식당이 몇 군데 있어서 시청각이 고루 즐겁다.
LA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인 아빌라 아도비(Avila Adobe)를 비롯, 최초 호텔인 피코 하우스와 LA 최초의 극장인 머세드 극장 등 19세기 건물 등 주요 사적지들이 모여있어 역사탐방을 겸할 수 있다.
라 골론드리나 카페는 올베라 스트리트에서 1924년에 오픈한 최고참 레스토랑.
1850년대에 지어져 LA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집인 랜드마크 Pelanconi House도 위치하고 있다.
관광 플랫폼 옥상에서 빤히 보이는 총독부 건물같이 중후한 인근 우체국 건물의 미태도 이 동네 자긍심이 아닐지.
이번 나들이의 최종 목적지인 '시케이로스의 벽화'를 만나긴 했으나 건물 하나 건너 '이탈리안 홀' 외벽에 그려진 실물 벽화는 먼발치에서 겨우 눈도장만 찍고 왔다.
강한 햇볕에 의한 탈색을 막고자 건물 위에 하얀 차광막이 쳐져 있어서였다.
한때는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회칠로 덮씌웠던 것을 다시 복구 오늘에 이른 벽화다.
사실 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투사에 다름 아닌 그에 대해 별로 호의를 느끼지 못한다.
시위 때마다 내걸리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붉은 걸개그림과 거친 함성부터 연상되기 때문이다.
종종, 불평등한 사회로 인해 팽배해진 불만과 분노와 증오심은 혁명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1세기 전 시케이로스가 열정적으로 선도한 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 멕시코 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전통 프레스코 벽화 기법을 유럽에서 공부한 그는 급진 사상의 영향을 받아 멕시코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회주의 미술가이자 열혈 혁명가였다.
남미인으로 유럽 유학파 시케이로스나 의대를 다녔던 게바라나, 조선 후기 동경 유학생이 된 지주 아들처럼 좌익이 되어 붉은 혁명으로 세상을 갈아엎겠노라 한 급진적 이상주의자였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을 통해 리얼리스트이자 휴머니즘의 화신 같은 체 게바라에 대한 환상에 빠져 나 역시 각색되고 포장된 이미지에 혹한 적이 있었다.
단, 그에 대해 오랜 기간 실증적 연구에 매달렸던 움베르또 폰토바가 저술한 <Exposing The Real Che Guevara>를 읽기 전까지 만이다.
청년 저항운동의 상징이기도 한 체 게바라의 주 활동 무대였던 중남미는 이후 소련의 지원을 업은 반군 게릴라와 마약으로 얼룩져 최빈곤국이 된 현실이다.
체 게바라는 미국 리버럴 좌익의 언론 플레이 작품으로 그의 실체를 벗겨보면 아연하게 된다.
평등과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투사로 각인된 그는 쿠바에서 요트 선착장이 딸린 대저택을 지니고 초호화 생활을 누렸다.
의대는 다녔지만 의사면허를 받은 바 없으며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체포되었을 당시 롤렉스를 여러 개 차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가인 피델 카스트로가 롤렉스 시계를 통해 권력을 과시하려 했듯, 그도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롤렉스와 왜 마지막 길을 동행하게 됐을까, 묘하다.
한편, 시케이로스는 미술교사로 LA에 거주하는 동안 80x18피트에 달하는 벽화 아메리카 트로피컬을 1932년 올베라 스트리트의 한 건물벽에 그렸다.
멕시코 출신 이민 노동자에 가해진 부당한 착취에 대해 벽화가 전한 정치적 메시지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덧칠 아래 감춰졌다.
이후 게티 보존연구소의 후원과 시의 재정으로 복원되어 2012년 새로이 만들어진 관람 플랫폼과 해설 센터와 함께 재공개되었다.
전 생애에 걸쳐 모순된 현실에 대하여 온몸을 던져 투쟁한 그는 노동운동도 했고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외로 추방되기도 했으며 옥살이도 수차례 했다.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적인 예술가의 입장에 서있던 그의 작품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과격하고 전위적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인디오 그리고 그 위에 앉아있는 독수리와 독수리를 겨냥한 저격수.
의미심장하다.
흐흠~~ 짐작이 가고도 남는 속내.
그래도 멕시코 출신 다비드 시케이로스는 죽는 날까지 문맹인 대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민족적이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를 그려왔다.
미국에서 머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특히 그가 뉴욕에서 주도한 모던미학 테크닉 워크숍은 젊은 화가들에게 돌풍을 일으켰다.
여기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액션 페인팅의 대가가 된 잭슨 폴락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붓거나 뿌리는 기법을 전수받은 제자다.
다혈질에다 강한 정치적 성향 때문에 '불의 사나이'로 불린 시케이로스는 1966년 레닌평화상을 수상했으며 그로부터 몇 해 지나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렬하고도 격정적인 그의 작품과 생애를 살펴본 영향 때문인가, 귀갓길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메트로에 오르자마자 피곤증이 몰려와 곯아떨어졌다. 2017
keyword
화가
혁명가
멕시코
6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무량화
직업
에세이스트
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구독자
61
제안하기
구독
작가의 이전글
흙마당이 있는 그 집
안단테 걸음으로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