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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물 들이던 날은 가을 하늘도 돕고
by
무량화
Sep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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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천연 날염을 시도해 본 것은 하늘 맑고 푸른 지난해 가을 어느 날의 일.
서귀포 시청 리포터 찬스로 감물 염색과 쪽물 염색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출발에 앞서 차편을 알아보고자 목적지 주소를 검색했는데 어라? 장소가 둘로 나온다.
두 곳 중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공방 위치가 아리송했다.
시간이 촉박해 서포터즈 단톡방에다 SOS를 타전했다.
지금 막 시청에서 공방으로 출발하려는 참이니 주차장으로 오세요~주무관의 응답.
고맙게도 즉시 구원투수 등판! 오~ 땡큐쏘마치!
곁에서 도와주며 언제나 곤경에서 구해주는 그날의 수호천사가 바로 그녀였다.
시청과는 오분도 안 되는 거리라 쏜살같이 달려가 그녀의 차에 동승할 수 있었다.
갈옷은 물론 침구류와 생활용품 그 무엇도 직접 사용해 본 적 없어 감도 못 잡는 순초보다.
다만 시원하고 몸에 달라붙지 않는 삽상한 인견 홑이불 느낌이겠지 싶은 정도.
또한 제주만의 전통 자연 염색법이라 호기심 만발. 손수 감물 염색을 한 이불 홑청을 득템 한다는 점도 바짝 구미를 당겼다.
자연이 키워 낸 감과 눈부신 햇살에다 사람의 수고가 더해져야만 완성된다는 갈옷.
갈옷은 천연 피륙에 감물을 들인 옷을 이른다.
따라서 천연 소재의 원단을 이용하므로 우선 피부 건강에도 이로우리라.
향토적이고 자연친화적인 황토색이라는 점도 반가웠다.
어릴 적 가을이면 외할아버지 댁 뒷동산에 올라가서 감이나 밤을 따먹었다.
덜 익은 감은 살짝 혀끝으로 맛 감별부터 해봐야지,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가는 떫어서 에퉤퉤~ 뱉어내기 일쑤였다.
그때 하얀 옷을 입었다면 영락없이 앞자락에 갈색 감물이 튀어 옷을 후 지르기 마련.
두서없이 옛 생각도 나고 대학 시절 염색공예 시간에 파라핀을 녹여 스카프에 무늬 그린 뒤 염색도
했더랬는데.
파라핀을 끓일 때 나던 양초 타는 냄새와 식물성 염료 후처리 시 식초에 삶으면 풍기던 독한 빙초산 내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공방은 중산간도로에서 좀 벗어난 한적한 교외에 있었다.
잘 다듬은 푸른 잔디밭이 인상적이라 잠깐 둘레를 돌아보니 저만치 한라산이 액자 속 그림처럼 떠올랐다.
갈바람은 살랑거리고 가을하늘답게 소담한 우유구름 양떼구름 한껏 평화로웠다.
교육장을 겸한 작업실이 따로 있고 실기 작업장은 허름한 가건물이었다.
수공예 작품인 커틴이 내려진 교실에서 기초 이론교육을 받은 다음 인견 홑이불과 백색 면 티셔츠 두 장씩을 배당받았다.
셔츠는 맘 내키는 대로 자유로이 손에 틀어쥐고 야무치게 묶었으며 홑이불은 일단 물에 헹궈 놓았다.
서포터즈 팀원들 모두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신바람이 나 열심들이었다.
염색된 집시풍의 작품이 햇볕과 바람과 공기의 조화로 숙성돼 가는 작업실 한쪽에서 먼저 감물 염색부터 들이기로 했다.
풋감을 따서 분쇄기에 넣자 곱게 갈린 땡감은 연둣빛 무더기로 변했고 그걸 꼭 짜서 즙을 냈다.
감즙은 고운 채로 걸러줘야만 날염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미리 준비된
누르스름한
감물
통
속에
홑이불
천을 담갔다.
충분히 감물이 피륙에 배어들도록
매매 주물러 줬으며 아예 통에 들어가 발로 꼭꼭 밟아 고루 감물이 들도록 다져줬다.
베이지색보다 옅어 거의 희득스레한 미색 천을 꺼내 잘 펴서 풀밭에
널었다.
도자기는 흙과 불이 만나 예측불허의 색감을 입고 태어난다.
그처럼
갈염 역시 감물과 햇볕의 작용으로
예측을 불허인 신비로운 색상의 변화를 보여준다는데.
잔디밭에 고루 홑이불을 펴 널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다녀왔다.
그새 볕 좋은 가을하늘 아래서 꾸득꾸득 마른 홑이불은 아주 연한 갈대색으로 변해 있었다.
청명한 가을볕 흠씬 쪼여
홑이불이 갈변되길 기다리며 두 번째 작업인 티셔츠 염색 작업에 들어갔다.
인디고블루보다도 더 짙은 감청색 염료 안에 셔츠를 넣어 주무르자 연둣빛부터 나타났다.
염료 물속에서 계속 치대며 힘껏 주물러대자 초록색이 되기에 셔츠를 건져 줄에 널려고
펴 들었다.
그 순간 셔츠가 공기에 닿자마자 파란빛 선연해지며 예의 쪽빛이 드러나
너무도 신기막측했다.
다만 셔츠 무늬가 맘에 안 들어서인지 탁한 블루가 비색(秘色)이라는 쪽빛일까엔 의문부호가 따랐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빛이니, 신비로운 쪽빛 바다란 말은 들어봤지만 정확히 이 빛일까
모호했다
.
짙은 푸른 남색을 쪽빛이라 한다는데 파란색은 블루에서부터 코발트블루 터키블루 피콕블루 마린블루
로열블루 등등 다채롭잖은가.
어쨌든 쪽빛깔은 쪽이란 염료와 공기가 만나 오묘한 조화를 부린다는 걸 오후 실기수업에서
비로소 배웠으니 소득은 소득이다.
젊은이들과 어울려 함께 한 염색작업도 재밌었지만 새로운 추억 쟁이기를 할 수 있어 더더욱 각별했던 하루.
집에 와 여러 차례 헹굼과 말리기를 반복하다가, 홑이불 색조를 더 이상 갈변시키고 싶지 않아 짙은 베이지 톤에서 마무리하고 개켜 넣었다.
홑이불 감촉이 풀을 먹인 듯 빳빳해서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밤 덮으면 삽상해서 제격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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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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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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