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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길 위에서 쓴 편지

by 무량화

-1993​-


초의 선사가 동다송에 적길 "차는 홀로 마시면 신묘하고 둘이 마시면 좋고 여럿이 마시면 나눠 먹이나 마찬가지"라 하였지요. 어찌 차뿐이 리오. 여행도 차 마시듯 혼자일 때라야 그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것.


물론 맘 맞는 사람과 둘이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주격이 된 나만을 데불고 홀로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맛과 멋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소. 일상의 굴레,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 거추장스러운 관형사나 일체의 접두어를 빼버린 진솔한 나를 낯선 곳에 세운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요.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편안함.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타관에서의 홀가분한 해방감을 누리려 길 위에 섰소.


누군가 말하길 여행은 삶에 있어서 잘 쓰인 한 편의 시와 같다고 했지요. 그렇소이다. 일상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풍물을 접하노라면 감각의 촉수 하나하나는 얼마나 명료히 눈을 뜨는지요. 경탄하고 환호하고 종내는 아득히 침몰할 수밖에 없는 감동과의 만남이 여행 아니던가요. 빡빡이 짜여진 일정일지라도 여행은 그래서 지치는 법이 없다오. 더구나 돌아갈 생활이 저만치서 기다리므로 매양 서둘러야 하는 발걸음이라 더 감칠맛이 당기는지도 모를 일이오. 잡은 손 놓아야 하는 정인과의 작별처럼 여행은 언제나 아쉬운 여운이기도 하다오.


다리품이 여간 아니었던 로마에서의 노곤함으로 달리는 버스에서 내처 잠을 자다 깨어보니 바로 곁에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소. 어느새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닿았던 거지요. 신기루처럼 물 위에 떠있는 도시. 아슬아슬 주추가 물에 잠긴 베네치아는 색다른 충격이었소. 버스도 배요 택시도 배인 이색지대 베니스로 건너가기 위한 연락선에 옮겨 타고도 왠지 환각이 아닌가 싶었소.


이태 전 배낭여행을 다녀온 맏이가 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 다시 가보고 싶은 곳으로 베니스를 꼽았더랬소. 석양이 반사되는 금물결과 바다 건너 먼 배경을 이룬 사원의 실루엣이 아름다웠던 베네치아. 그 한 장의 사진이 내 마음 깊이 새겨져 유럽여행의 꿈을 꾸게 했고 실제 유럽여행을 부추기는 불씨이기도 했던 셈이라오.


백 열여덟 개의 섬으로 구성된 베네치아는 섬과 섬을 연결하는 무수한 다리와 운하에 뜬 곤돌라로 상징되는 도시 아니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산 마르코 주위를 선회하는 비둘기 떼 장관이고 종루의 종 치는 동상이 특이했던 베네치아. 베네치안 글라스로 불리는 유리공예와 화려한 가면이 유명한 그곳. 뿐 아니라 레이스 제품이 뛰어난 베네치아는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이 낙천적인 이탈리안의 호방한 웃음과 기타 소리였소. 생존의 치열함은 그들 몫이 아닌 듯 곤돌라 뱃사공도 천하태평이고 환전소 직원의 손놀림조차 둔한 몸매대로 좀체 빨라질 기미가 안 보였소.


미로처럼 나있는 좁디좁은 골목의 촘촘한 가게는 오후 여섯 시, 아직 해가 한 자는 남았는데도 느긋이 문을 닫고 있었소. 그야 유럽 어디나 마찬가지였지만요. 무엇보다 생필품을 사야 하는 슈퍼마켓조차 일찍 폐점을 하기 때문에 서둘지 않으면 음료수나 간단한 요깃거리를 놓치기 일쑤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소. 우리 식으로야 아무 때나 드나들며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는 게 마트고 심지어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도 있는데 말이오. 삶의 질을 우선으로 치고 있는 유럽에서는 일반 가게마저 직장으로서의 근무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더랬소. 이처럼 일찍 문을 닫는 가게로 인해 낭패를 겪게도 되지만 그보다 특히 아쉬운 점은 문화유적지나 박물관 등의 개방시간이 여축없이 지켜지는 거였소. 그 까닭에 몇 군데 관심 가는 곳을 겉만 둘러봐야 할 때였소.


도착해 보니 어느새 관람시간이 끝나 문이 내려졌기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청인 두칼레 궁전도, 아카데미아 미술관도 마찬가지였소. 해가 질려면 아직 한참 있어야 하는 오후 시각인데도 말이오. 대신 황홀하기조차 한 아드리아해를 끼고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를 스치며 사백 년 전 전성기의 베니스 공화국 당시 만들어진 리알토 다리를 찾았소. 그 옛적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개성 청년이 등장하는 소설이 자연스레 떠올랐소. 짙은 눈썹과 풍성한 옷차림이 인상적이던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루벤스의 그림도 함께요.


십자군 전쟁 이후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국제적인 상업도시로 유럽의 경제를 좌지우지한 베네치아. 아드리아해를 마당 삼아 세계로 무역선을 띄워 보내던 이 도시가 지금은 옛 추억을 반추하며 관광지로 명맥을 유지하는 듯하였소. 침강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와는 달리, 물결마냥 밀려다니는 여행객들과 비대한 섬사람들의 왁자하니 떠들썩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활기가 넘치는 곳이기도 하였소.


몇 개의 다리를 건너고 한참을 돌아다녔는가 싶은데 개미지옥에 빠진 듯 맴맴이를 돌다가 다시 산 마르코 광장에 이르렀소. 왠지 멀미가 나는 것 같고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었소. 실제 도시의 포도를 거닐면서도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온 데가 물 천지라서 인 모양이라오. 묘기 부리듯 거대하고 견고한 석조건물들이 물 위에 떠있지만 어느 한순간 가뭇없이 가라앉을 것만 같은 도시. 단순 상식으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신비의 도시 베네치아였소. 그러나 운하 쪽으로 나있는 창가 빨랫줄에는 색색의 옷가지가 사람 사는 자취로 나풀대고 있더이다.


낙조는 어디서나 장엄한 법이라오. 절로 두 손 모두게 할 만큼 경건한가 하면 화려하고 황홀하기까지 한 노을빛이지요. 잠시 침묵할 사이, 금빛 물비늘 잘게 반짝대던 바다는 점차 표정을 잃어갔소. 곧이어 가로등 일시에 떠오르며 바다에 불빛 꼬리가 일렁거리기 시작했소이다. 물기 머금은 초롱한 별이 아청빛 하늘에 점점이 떠오르자 광장 카페마다 음악소리 한층 높아져 갔소. 유명 작가들이 자주 들렀다는 노천카페의 악사들 몸짓에 신명이 오를 무렵, 그 많던 비둘기 떼는 삽시에 광장을 비우고 사라져 버렸소.


베니스를 떠나는 배편 기다리는 동안, 빈대떡보다 더 얇은 피자 쪽으로 저녁을 때웠소. 부산에서 사 먹은 푸짐한 피자 얼굴이 문득 아쉽게 떠오르는 순간이었소.

ㅡ모든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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