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선비 가람선생의 시비

by 무량화


충청도 공주 논산을 스쳐지나 안온한 고향마을 같은 전라도 익산에 이르렀다. 점심도 먹을 겸 여산휴게소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익산은 반쯤 허물어진 미륵사지로만 기억되는 곳. 물론 초행길이다.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이 목적지라 아직 반이나 남은 여로.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 줄이려고 집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들고 휴게소 입구에서 미리 점찍어 둔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양지바른 언덕에 그럴싸한 정자, 그 앞에는 가람 시비와 석탑이 서있었다. 단풍 그늘 아래 벤치도 편안해 보였다. 문인화 곁들여진 가람 선생 시조가 여기저기서 시선을 이끌었다. 익산에서도 두메산골인 여산 쪽에 공교롭게도 고속도로가 열리며 여산휴게소가 들어서자 가람 선생을 기리는 작은 기념 동산이 꾸며지게 된 건 필연. 익산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가 된 가람 선생이다. 그분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자 귀향하여 여생을 보낸 생가 옆에 가람 문학관이 있다 하나 이만으로도 감지덕지. 현대시조를 이끈 선생의 향훈에 잠시 젖어볼 수 있음이야말로 우연찮은 행운이 아닐쏜가.



국문학자이자 시조 작가인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은 전북 익산시 여산면 출신이다. 조선 후기 무렵 조부께서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고종 28년에 태어난 선생은 조부의 뜻에 따라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변호사인 부친은 교육만이 조선의 희망이라 여겨 장남을 한성 사범학교에 진학시켰다. 학교를 마친 이후 국문학자이자 교사로 지내다가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고 한국전 당시에는 전북대 문리대 학장을 역임한 가람 이병기 선생.



江의 순우리말인 가람이라는 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불운 속에서 일찍이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는데 힘썼다. 우리 말과 얼을 지키고자 힘을 다하다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의 옥고를 겪기도 한 가람 선생.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대쪽 같은 인품대로 국립묘지 안장도 마다한 채 절대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다는 분이시다.



시조 보급과 아울러 고문헌을 수집하면서 서지학(書誌學) 및 국문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가람 선생. 특히 한중록, 인현왕후전, 신재효의 춘향가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하였다. 육이오가 터지자 당시 박봉을 쪼개 모아둔 고서를 트럭에 실어 고향으로 옮겨 놓았다가 훗날 서울대학교에 일괄 기증하였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 문화 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 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조 <난초> 시비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고서 몇 권과 술 한 병, 그리고 난초 두서너 분이면 삼공(三公)이 부럽지 않다”고 한 가람 선생. 평생을 난과 더불어 지낸 그분의 난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가는 담배조차 끊고 사셨다는 얘기로도 미루어 짐작이 된다. 시조와 난초와 제자와 술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스스로 귀한 복을 타고났다 한 그분. 현대시조의 초석을 놓았으며 난을 아끼는 기품 있는 선비셨고 호방한 애주가였던 가람 이병기 선생. 다만 술로 인해서인지 뇌일혈로 쓰려지며 거동이 불편한 말년을 보내셨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난초 두서너 분 가꾸며 심전 역시 맑고 고결하게 다듬어나간 족적을 헤아려 나가다 보니 선생에 대한 흠모가 무한 피어올랐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작곡가 이수인이 곡을 붙여 대중적 사랑을 받는 가곡이 된 <별>이라는 시다. 개화기의 현대적 시풍으로 쓴 <별>은 어느 저녁나절의 간결한 스케치같이 단조로운듯하면서도 아취가 배어있다. 가락과 품격과 서정이 어우러져 서느러니 전하는 별의 향기 문득 시월의 명징한 여산 하늘가로 스며들었다가 허밍 하는 우릴 이내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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