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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Sep 24. 2024

'토지'의 작가, 황토 품에서 쉬다

통영으로 향하던 그날, 늦가을비가 봄비마냥 고요히 내렸다.

종일토록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미리 듣긴 했으나 날씨와도 상관없는 여정이었다.

아니 우중이라면 오히려 더 그럴싸한 분위기일 거 같았다.

비에 젖은 날이라면 박경리기념관과 묘소를 차분히 둘러보기 안성맞춤일 테니까.

부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안개 같은 세우(細雨)가 꽃비 되어 뿌렸다.

안개비로 거가대교의 새하얀 사장교(巨加大橋 斜張橋)가 환영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김약국의 딸들>을 읽은 여운이 며칠째 선연하게 휘몰아쳐 그 여세에 밀려 찾게 된 통영이다.

박경리기념관은 월요일이라 휴관, 한국인이라면 박경리 선생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을 터라 별로 아쉬울 것도 없어 곧장 묘소로 올라갔다.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난 이후 48년 만인 말년에 통영을 찾은 선생.


한산도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미륵산 아래 양지 농원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죽으면 이곳에 묻히고 싶다” 하셨다고.

유언 같은 말을 남긴 얼마 뒤 선생은 눈을 감았다.


이에 농원 주인은 선생의 유택 자리로 선뜻 1천 평의 땅을 내놓았다.

그렇게 마련된 묏자리에는 평소 검소한 성품대로 비석 하나 세우지 않은 작고 소박한 분묘에 상석만 놓여있었다.


담박하고 간결하게 가꿔진 공원 묘원에는 선생의 시와 산문이 돌에 새겨져 있고 조경수와 벤치 단출했다.

그러나 땅이 좋아서일까, 비에 젖은 금잔디 부드러웠고 단풍나무는 제 뿌리짬에 마른 잎새 꽃잎처럼 깔아 두었다.

남도 길 평야에서 더러 태깔 고운 황토를 구경한 바는 있지만 그토록 붉고 차진 황토는 난생처음 접해보았다.

오죽하면 다음날 기념관에 전화해서 혹시 질 좋은 황토를 구해 대토 한 것인지, 원래 그 자리 흙인지 문의를 다 해봤을까.


아래 사진의 산자락 도로가 드러낸 황톳길 색깔이 보여주듯 흙이 무척 붉더라는.



황토는 생명을 품은 흙이다. 고로 황토는 단순한 흙의 개념을 넘어선다.

기본적으로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야 농경 생활의 좋은 터전이 됨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그처럼 문명의 발상지인 인더스, 황하, 메소포타미아는 모두 황토지대였다.  

또한 선대들 대대로 황토집에서 살았으니 일단 주거생활의 기본이 되는 황토다.

황토의 원적외선을 이용하는 황토 한증막은 몸속 독소를 빼주는 대중 건강요법의 하나이다.

강화도령 철종이 고향 처자와의 첫사랑을 못 잊어 상사병에 시달릴 때 황토방에서 요양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토로 만든 옹기는 숨을 쉬기 때문에 전통식품인 장류나 김장김치가 적당히 발효되며 깊은 맛을 내도록 도와준다.

어민이나 양식업자에게 큰 피해를 주는 연안의 적조현상을 막는 특효약으로 황토가루를 바다에 뿌리기도 한다.  

묏자리에서 정면을 바라보니 풍수설은 몰라도 한눈에 지형이 명당터로 집터여도 훌륭한 배산임수 지세다,

음택(陰宅) 덕으로도 외손주 둘 뿐일지언정 후대 발복의 좋은 기운을 듬뿍 전해줄 것 같았다.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이 추천되어 등단한 이래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 등 사회문제를 버무린 비판적인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선생은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부터 사반세기에 이르는 세월을 세상과 유리된 채 집필에만 몰두했던 선생은 기념비적 소설 <토지>를 펴낸다.

모든 순간마다에 노력을 쏟는 것은 자신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문득 그분과 겹쳐졌다.

1980년 서울을 떠나 강원도 원주에 정착해서 토지 4, 5부를 탈고하는 동안 살았던 집은 뒤에 박경리문학공원으로 기려진다.

원주 집이 택지 개발에 포함돼 1998년 가까운 회천 마을로 옮기며 받은 보상금과 토지공사 기금을 합쳐 토지문화관도 세웠다.

이때 선생은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서 소설 창작론 강의를 맡고 있었다.

한편 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악양면에도 최참판댁을 재현시킨 평사리 박경리문학관을 하동군에서 만들었다.

선생이 작고한 뒤인 2010년, 가장 늦게 비로소 향리에 박경리기념관과 박경리공원이 들어섰다.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 여장에 우리 근대사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토지를 집필한 박경리 선생이다.

동학혁명, 외세의 침략, 신분질서의 와해, 개화와 수구, 국권 침탈,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의 세월을 거대한 서사구조로 형상화시킨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 현대문학 100년이 이루어낸 가장 눈부신 성취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홀로 번민하고 고뇌하며 원고지 칸을 메운 그 공력은 감히 어림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경계가 아니랴.

그리하여 금세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라는 빛나는 상찬을 받은 선생이다.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 선생이 지어줬고 본명은 박금이.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불행하게 살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분노에 더해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조차 그녀를 극단적인 고독의 정서 속에다 몰아넣어 소심한 성격으로 자랐다.

그때 강하게 빠져들었던 것이 바로 독서였고 그렇게 공상의 세계를 무량이 쌓아나갔다고.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1946년 결혼 후 1950년 황해도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었다.

그 와중에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잃는 고통을 견디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도 있다.

외동딸의 사위는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 김지하로 긴 옥고 생활과 무기징역형에 사형 선고까지 받은 바 있었으니 선생은 슬하의 딸을 바라보며 오죽 애간장이 녹아내렸을까.

선생은 1926년 예향 통영 명정골에서 태어나 굽이굽이 한 서린 생애 초연히 엮어가며 강원도 원주에서 글 쓰고 텃밭 호미질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며 마침내 2008년 향년 82세에 시원으로 돌아갔다.

 그를 낳아 키운 향리로 회귀한 자리, 박경리공원으로 조성된 새김터 안에 영원한 보금자리 들어섬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2001.12.3  -2002년 판 <토지>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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