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하신 박경리 선생(1926~2008).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토지길 1에 위치한 박경리 문학공원을 찾았다. 신록 연연한 공원 들머리, 그분이 열여덟 해를 살았던 집 돌담에서 그분이 쓴 시 여러 편을 만났다. 그중 한 편이 정수리에 박히면서 저절로 아이고~선생님! 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동시에 비장감 스민 성지나 경건한 종교의식을 대하듯 감정이 착 가라앉으며 자못 숙연해졌다. 우뚝 높다라니 솟은 문학 거봉의 글이라서가 아니었다.
수시로 널뛰듯 하는 감정, 이 나이에도 자제력이 부족한 터라 여전히 기복 심한 감정의 파도를 타곤 한다. 분명 다혈질은 아닌데 사소한 일에도 목숨 건듯 기분이 격앙되거나 쉽게 흥분하는 편이니까. 나아가 하늘에 한 점 거짓 없이 솔직하게 고해성사하기로 들자면, 저마다 다 저 잘난 맛에 사는 우리 아닌가. 오죽하면 일찍이 네 꼬락서니를 알라, 하신 소크라테스 같은 양반이 있었겠는가. 가끔 고개를 쳐드는 허세와 교만으로 자기도 모르게 오만방자해지곤 하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죽비로 후려친 '우리들의 시간'이란 제하의 길지 않은 시. 성찰의 제단 앞이듯 옷깃 여미게 하는 '한 말씀'이었다.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이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 본들 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그분. 원주에 위치한 문학공원은 선생께서 생전에 직접 살면서 작업했던 집 근처에 조성된 문학공간이다. 한국 문단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칭송받는 20부 대하소설 토지 4부와 5부의 산실이기도 하다. 선생은 1969년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해 1994년까지 무려 26년간, 사반세기 동안 온전히 세상과 차단된 채 집필에만 몰두했다. 동학에서 광복에 이르는 시간적 배경 아래 평사리 마을 사람들이 엮은 삶의 자취를 그려낸 '토지'다. 이어서 선생은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 가자'를 2003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게 됐다. 선생은 1980년부터 원주에 머물며 토지 4부와 5부를 쓴 단구동 주택이 토지개발계획에 들어가, 부득불 1998년에 흥업면 매지리 회천 마을로 이주했다. 원주의 자부심인 선생의 집터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한국토지공사에서 공원 부지로 전환시켜 선생이 살던 집과 정원을 고스란히 원형대로 보존시켰다.
선생이 오래 거주했던 공간으로 곳곳에 선생의 체취가 스며들어 있는 옛집. 수없이 하얗게 밤을 지새웠을 서재와 홀로 거닐었을 집 뒤 언덕이 괜히 마음 짠하게 했다. 뜰 중앙에는 선생의 동상이 고양이 한 마리 데불고 쉬고 있으며 손자를 위해 손수 만들었다는 연못엔 하얀 낙화 몇 잎 떠있었다. 토지 4권에 서럽게 묘사된 함안댁 살구나무, 그 살구가 어느새 엄지손톱만큼 자라 신록 사이로 고개 내밀었고 마당 한켠 직접 호미질했던 텃밭은 무성한 대파밭되어 남겨졌다. 수수꽃다리 향기로운 뒤란 비스듬 산언덕 오르니 시누대 시퍼런 댓잎이 평사리 최 참판 댁 부근처럼 자욱했으며 여리디 여린 봄꽃 애기똥풀 무리 져 노랗게 피어있었다. 공원 인근은 소설 토지의 배경에서 따온 용두레벌,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등으로 가꾼 테마공원으로 가꾸어졌다.
한국문학계의 거목 중 거목이신 박경리 선생. 그분의 준엄한 문학정신 우러르면 치기 어린 소꿉질에 불과할 뿐인 풋내 나는 자신이다. 1987년 등단하여 문단 말석에 이름 석자 올리면서 왠지 자꾸만 죄송한 생각이 들었던 분이 박경리 선생이었다. 감히 그런 대가 반열은 처음부터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그만두고라도 저 아랫자리나마 걸터앉았다는 게 무척 송구스러웠다. 죽을 각오로 밤낮 지새우며 피땀으로 한 자 한 자 글을 새겨본 적도 없다. 혼신의 열정 다한 각고의 노력은커녕 심심풀이 놀이 삼아 글을 써 온 주제에 어찌 그 높은 경계를 흠모라도 하랴. 그분 댁을 나오며 걸핏하면 이런저런 잡설 가벼이 펼쳐 온 자신이 부끄러이 돌아봐졌다. 묵언정진, 얼마나 유효할지는 모르나 앞으로 침묵에 길들여봐야겠다는 다짐을 놓으면서 원주를 뒤로하였다. 겹매화 핀 몇 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그러나 애써 공들인 적 없으니 언감생심 도로무익이며 도로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