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에 다가서기

by 무량화

이 뭣꼬?

단 하룻밤 새에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온 천하를 장악해 버렸다.

수상한 낌새는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형체도 없이 점령군의 진입은 그야말로 느닷없이 이루어졌다.

이상스러운 조화 속이다. 희한한 이것은 대관절 무엇인고?

한밤 자고 나니 온통 낯설어진 풍경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가르쳐 준 바 없는 놀라운 변화에 어리벙벙하다 못해 꿈을 꾸는가 싶기도 하다.

보고 또 봐도 도무지 가늠이 안된다.

눈을 치떠도 보고 가느스름하게 모아도 본다.

아지 못할 낯선 것에 대한 경계의 눈길만도 아니며 집요한 탐색의 눈초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호기심으로 반짝대는 눈빛도 아니며 그냥 심드렁하니 무심한 응시도 아니다.



은세계를 처음 보는 고양이다.

여태껏 낯익었던 모든 것이 변해버려 거의 딴 세상이 되다시피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본능에 의해 직감에 의해 학습에 의해 새로운 것에 길들여지던 통상적인 전례 그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대 이변이다.

생경함이 주는 불안감은 긴장을 고조시킨다.

한껏 웅크린 채 눈에다 시선을 붙박은 고양이.

심각하다기보다 심란스러운 표정임이 활처럼 굽은 등에서도 드러난다.

낯설기만 한 이 상황에 어찌 대처할 것인지 작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익숙지 않은 것은 섣부른 접근에 앞서 일단 주의 깊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오도카니 앉아 한참을 눈싸움만 한다.


무턱대고 발톱 세워 공격할 것인지
슬슬 비벼대며 다가가 친해질 것인지 얼른 가닥이 잡히질 않는 모양이다.

드디어 미동도 않던 자세를 허문다.

유화정책을 펴기로 한 듯 경직된 허리를 풀고 눈이 쌓인 뜰로 내려선다.

살살 앞발로 눈을 헤쳐본다. 아무 반응이 없다.

대거리가 없으니 이번엔 눈 위로 사뿐 올라간다. 여전히 기척이 없다.

대신 아기 볼 만큼이나 보드라운 발바닥을 통해 쩌릿한 감각이 등줄기에 좌악 번진다.



녀석은 지난 하지 무렵, 생후 얼마 안 되는 아기 고양이일 적에 우리에게 왔다.

그러니 겨울나기는 처음이다.

한여름 뇌성 번개가 심하던 날은 잔뜩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벼락이 떨어지자 탁자 밑으로 납작 숨던 녀석이다.

거친 가을바람에 흥건히 쏟아지는 낙엽도 무섭다고 피하던 녀석이다.

하물며 세상이 하얗게 바뀌어버렸으니 천지개벽이나 진배없다.

헌데 막상 접해보니 싱거울 정도로 별거 아니다.

고양이는 발에 묻은 눈을 흔들어 털며 짐짓 혼잣소리를 할 것이다.

차가울 뿐이지 대단치도 않은 걸 가지고 괜히 긴장했잖아!



겨울이라는 낯선 상황과 서서히 친해져 가고 있는 고양이.

친해져 가고 있다는 것은 길들여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했다.

그렇게 새로운 것에 길들여지기까지에는 나름대로 내부의 작은 공황을 경험하였으리라.

익숙해 있던 사물과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이 맞는 국면에 적응돼 가는 과정에서는
심각한 내적 갈등과 반란을 누구나 겪게 마련이므로.

생소한 것과 마주치면 비록 잠시일지라도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고양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게다.



그처럼 우리도 날마다 아니 매 순간마다 두려움 반, 신선함 반으로 낯섦과 만나
스트레스라는 터널을 통과하며 낯섦을 차츰 낯익음으로 전환시킨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고단한 일인지 모른다.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

매일매일의 오늘은 낯설음이고 그래서 매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맞게 되는 아침이다.

첫추위에 피부가 한랭 알러지로 반응하듯 계절이 바뀌어도 한동안 우리는 낯가림을 심하게 한다.

그뿐 아니다.

七情에 매여 파도를 타는 자신에게조차 때로는 느끼는 낯섦.


하물며 전학을 가고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하고 이민을 떠나는 등 친숙함이 사라지는 일은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다가서는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이다.

낯선 다른 것은 새로운 자극이기도 하나 낯섦이 가시기까지 당분간은 틀 밖에서 겉돌며 서먹한 이질감을 맛보아야 한다.

하여 우리는 낯익음 속에 안주하기를 더 원한다.

보장된 안정 구도는 우선 믿을만하고 편안하니까.

타성에 빠져 즐기는 나른한 권태감도 과히 싫지만은 않으니까.



한편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소망하며
현실을 바꿔보려 애쓰고 가끔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기회가 주어지면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것은 낯섦과 마주칠 때 일어나는 팽팽한 긴장감을 감당해 내기가 버거워서이다.

낯섦으로 시작되는 모든 것과의 첫 관계.


그 대상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로
어색함으로부터 놓여나 스스럼없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어느 경우나 그리 녹록지만은 않은 일.



반면 고여있는 물이길 거부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친구 아들은 두뇌 명석하고 패기만만한 젊은이다.

전도 유망한 한국 굴지의 기업인 S 전자에 근무하던 그는 과감히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유학길에 올랐다.

글로벌 시대의 젊은이답게 그의 포부는 세계를 무대로 뛰는 것이다.

당시 머리 싸매고 말리던 친구는 급기야 몸져눕고 말았다.

진취적인 개혁보다는 현실 안주를 택하는 게 보수적인 기성세대임에야.

아직 평가는 이르나 그의 용단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값진 투자가 되리라는 확신이 간다.

그는 아직 젊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고 강한 결단력과 의지력이 있기에 반드시 뜻한 바 목표를 이루어 낼 것이다.



그 외에도 보통의 평균적인 우리 의식과는 달리 오지나 극지 탐험을 하는 이들과
미답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자는 불가능과 불확실성에 도전한다.

이미 나있는 길이 아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 길을 내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다.

그에 따른 고난과 역경을 마다하지 않음은 물론 생명까지 기꺼이 바치는 그들의 순교에 의해
세상은 발전했고 세계는 넓어졌다.

이처럼 낯섦은 항용 용기 있는 도전자의 개척에 의해 그 견고한 껍질을 벗는다.

익숙해진 삶의 양태로부터 벗어나는 일, 낯섦에 대해 가지고 있는 원초적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모험에 나선 사람들은 그래서 위대하다.



누군지 처음으로 굴을 먹은 이는 굉장한 사람이라 했던가.

하물며 직접 자신의 몸을 시험대 삼아 약초를 가려낸 허준은 그래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발명가 에디슨(대단한 비즈니스맨일 뿐이라지만)은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아무리 발견의 의미가 축소되고 그 가치가 희석된 요즘일지언정 처음으로 신대륙에 깃발을 꽂은 콜럼버스(역시 비즈니스맨일 뿐이라지만 )도 탐험가로서는 앞선 사람이다.

달나라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암스트롱의 결단력에 이르러선 위대하다는 단어가 절로 따르게 된다.

과학적 장치가 완벽하게 뒷받침되는 우주여행일지라도 말이다.



낯섦에 다가서기 그리고 익숙해지기란
존재하는 것 모두에게 부과된 숙제이자 치러야 할 시험 같은 것.

크고 작은 시험은 생애 도처에 깔려있는 복선이면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도약대이다.

그 덕에 세상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풀지 못하고 남겨진 마지막 숙제인 죽음.

종국엔 너나없이 공평하게 모두가 맞게 되는 죽음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길이, 아무도 다녀오지 않은 낯선 길이기 때문은 아닐지.

창가에 앉아 두서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좇는 내가 싱거운 듯 겨울 양광 아래 고양이는 지금 시물시물 졸고 있다.


2002 미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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