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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게 동래의총이 전하노니

by 무량화

거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킨 이 누구였던가.

몸소 적을 막아선 자 군왕이나 고관대작이 아니었네.

이름 없는 백성들이 몸으로 맞서 지킨 이 나라라네.

임진년 그날에 백의를 피로 물들이며 숨 거둔 고결한 영혼들이 있었네.

일신의 안락 구하지 않고 앞장섰다가 왜병의 모진 칼 아래 스러져간 의로운 넋들이여.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자 자신의 몸을 호국의 제물로 삼은 분들의 숭고한 충절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있음이네.

당신들이 있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음이니, 아는가? 이 시대를 사는 대한인 들이여.

그저 살아남고자 숨죽이는 자, 큰 물결에 그냥 휩쓸려 가자는 자, 힘없다고 무기력하게 좌절해 버리는 자. 낙담하고 절망에 빠져 아예 외면하는 자.

아니라네, 저항하지 않으면 대대로 피라미 올챙이로 살아가야 하고 참인간 답지 못하게 평생 빌붙어서나 살아야 하네.

선포하시게, 치사하고 비겁하게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한목소리 내어 대한 땅 곳곳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 토하시게나.

그렇다네, 그래야만 으스름 달 지고 내일은 새로운 해가 뜰 수 있다네.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은 소리 없이 그러나 뜨거운 음성으로 후대들에게 전할 말 있다 하네.

끝내 해방도 우리 능력으로 쟁취한 게 아니었고 육이오도 우리 힘으로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네.

번번 누군가가 가져다주면 감지덕지 덥석 받아 안는 비굴함 이젠 버리라 하네.

올곧은 정신으로 눈 부릅뜨고 죽기 살기 임전무퇴의 기백 살려야만 풍전등화의 위기 벗어날 수 있다 하네.

팔 하나 떨어져 나가고도 활시위 당기려 했던 임진년의 결의가 있어야만 인간의 자존감 지켜진다 하시네.

아무리 골골에 망쪼 들었더라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끝까지 진실 밝히려 고군분투하는 노력들 외면한다면 변화는 아니 온다네.

거듭 말하지만 바르다, 옳다는 뜻의 義는 羊과 武가 합쳐진 문자로 제단에 올려진 양을 칼(武)로 잡으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네.

義는 희생제물의 죽음을 의미하듯 자기희생이 없는 의는 없다 하네.

동래의총 나서는데 공교롭게도 저녁예불 시간 알리는 범종소리, 바로 옆 금정사에서 뎅그렁뎅그렁 사바세계 우주 만물 안녕을 기원하며 울려 주데.

서른세 번의 범종소리 깊은 여운에 잠겨 한참을 손 모둔 채 그대로 서있었네.

귀갓길 따라와 준 맥놀이 오래오래 흉중에 감돌았다네.

부산 금정산 이래 금강공원에서도 한참 깊숙이 들어섰다가 낯선 충절문을 만났다.


안내문에 동래 의총이라고 쓰여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의 대군을 맞아 부사 송상현 공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무명의 군관민 유해를 거두어 대형 봉분을 갖추어 만든 묘소라 한다.

'임진 동래 의총' 또는 외삼문 앞 화강암 비석 앞면에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어 그대로 불리기도 한다.

1731년 동래 부사 정언섭이 퇴락한 동래 읍성을 재건할 때, 임진란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에서 수많은 유골과 부러진 칼, 화살, 포탄 등을 발견했다.

왜적에게 겹겹이 포위당한 동래성을 지키고자 의연히 용기 세웠던 분들, 하많은 유골에 박힌 포탄이 목숨 건 그날의 처절한 격전 현장을 무언으로 증거 했다.

충절의 유해를 거둬 동래부 남쪽에 있는 삼성대(三星臺) 서쪽 언덕에 무덤 여섯을 만들어 안장하고 비를 세워 부사 정언섭이 내력 적은 글을 썼다.

일제 말 토지 개간으로 발굴된 유해를 동래구 복천동 영보단(永報壇) 부근에 이장했는데 1974년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금강 공원 안쪽에 옮겼다.

나라에서 제사 비용의 마련을 위해 제전(祭田)을 주고 향교에 맡겨 추석에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성의 함락일인 음력 4월 15일 동래구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현재 금강 공원 안의 금정사(金井寺) 옆에 담을 사이에 두고 자리해 있다.

부산은 이 나라 남쪽의 변방이라 최일선에 서서 바다 건너 외세의 거친 비바람과 맞서야 했다.

길고 긴 칠년전쟁 임진왜란 초기부터 부산인들은 적들에게 마구잡이 살육당하며 온갖 신산스런 고초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하여 역사 속의 부산포는 두루두루 하나같이 피로 물든 격전의 현장이다.

그 파란의 역사물 중 하나인 동래성 의총.

세세생생 내려온 충절의 단심(丹心)인 양 홍송 울창한 의총 입구에서 맞아주는 쭉 뻗은 소나무들은 의인의 기개처럼 사철 푸르르고 위풍당당했다.

외삼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여러 영세불망비와 선정비가 즐비하게 도열해 있으나 일별하고 잘 다듬어진 돌길을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한식 담장 단아하게 둘러쳐진 내삼문이 기다리는데 걸려있는 임진동래의총 편액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내삼문을 지나면 저만치 우뚝 선 충혼각, 그 왼짬에 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 새겨진 비가 옷깃 삼가 가다듬게 만들었다.

주변에는 곧은 절조를 상징하는 오죽(烏竹)이 둘러선 채 여려진 오후 햇살 아래 댓닢 나부끼고 있었다.

오래전에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충혼각만 올려다보고 끝이라 여겨 그만 돌아섰는데 그땐 몰랐던 충혼각 뒤에 모셔진 의총 봉분으로 향했다.

북향 한 충혼각 뒤편 맞바로 가 의총, 제실 문을 열고 제향 올리면 커다란 묘소 전체가 곧장 바라보일 터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요로운 사위, 절로 숙연해졌다.

합장배례 올린 뒤 민망하고 염치없지만 이 나라의 앞날을 부촉(咐囑)하고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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