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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역사가 서린 동래

by 무량화

찬서리 벗해 고요히 피어났다가 미련 없이 뚝뚝 이우는 동백꽃.

동백은 단순 소박한 홑겹 토종 동백꽃이 동백다워 나는 좋다.

화려하게 흐벅진 겹동백은 까멜리아로 구분해 나름대로 부르곤 한다.

지는 동백꽃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처연스러움에 어깨 움찔했을 것이다.

비장함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꽃잎 미쳐 시들기도 전이다.

온전한 송이째로 툭! 목이 떨어져 내린다.

동백꽃 지듯 스러져간 무수한 사람들을 회억하게 하는 낙화다.


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바로 이 땅에서 태어났다는 게 죄라면 죄였다.

저마다 소중한 목숨 초개같이 던져야 했던 동래부 사람들도 그렇게 져갔다.

400여 년 전인 1592년 4월 13일, 3만의 왜군은 조총 앞세워 부산진성을 함락시킨다.

이튿날 아침 그 승세를 몰아 왜적 떼는 군졸과 민초들이 성 안으로 피한 동래읍성 문을 부수고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왔다.

왜적들은 명나라를 치려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나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한다.

이어서 벌어진 전투에 중과부적, 열세임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나 결국 성은 떨어지고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남녀노소만이 아니라 개 고양이까지 참살당한 그날의 현장은 아비규환의 도가니였다는 것이 훗날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데.

그로부터 413년이 지난 2005년 3월 부산 지하철 4호선 공사 현장 지하에서 동래성 전투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화살촉이며 창칼과 뒤엉킨 유골들이 수십구였는데 그중에는 칼날 아래 무참히 희생된 어린아이의 유구도 있었다.

현재에 전해지는 그날의 기록 하나를 옮긴다.

ㅡ 4월 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났다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 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선 중기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쓴 맹하 유감사(孟夏有感祠) 글이다.

오천에 이르는 조선인이 참혹하게 죽어나간 그날의 역사를 돌아본 현장.

동래부 동헌 뜰에 핀 매화꽃 분분히 날리는 오늘 유난히 봄바람 거칠다.

역사를 잊은 백성에게 그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였다.

왜국뿐인가, 같은 민족이라 품어 안으려 하는 북과의 관계도 곰곰 오래 두고 짚어볼 일이다.

무방비 상태로 침략을 당해 혼란에 빠진 동래성을 겹겹 포위한 개미 떼 같은 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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