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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태 박물관의 고즈넉함
by
무량화
Oct 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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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가 다르다는 걸 절로 느낀 건 이 공간에서다.
행자 씨의 박물관은 다다오의 건축미나 여러 거장들의 미술작품들로만 빛나는 걸까.
그보다는 정적이고 정겨운 후원들에 둘러싸였기에 그녀가 누리는 심신의 아늑함이 더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극히 개인적 견해이지만 여기서 부럽다는 생각이 든 곳이 몇 있다.
본태 이름대로 고즈넉한 후원과 루프탑의 조망권과 한지창에 빛 스며들던 명상실.
문득 마음이 끌려 한 점씩 소장하게 된 오래된 석물들이 본디 제 터처럼 자리 잡은 정원.
주변에 울멍줄멍 둘러 세운 오름들의 푸르름도 좋지만 송악산 산방산 단산 모슬봉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루프탑.
다다오가 일본인이기는 하나 여백의 미를 아끼는 한국적 정서를 아는구나 싶어 고개 주억거린 명상실.
셋 가운데서도 그중 마음 끌리던 곳이 명상실이다.
마음 챙김을 위해 고즈넉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명상은 일상의 번잡을 떠나 세사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거나 나만의 안뜰로 은거해서 오롯이 깊고 넓은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이다.
급한 성격을 다스리기 위해 내게도 꼭 필요한 명상, 하여 호흡명상이나 관조명상을 가끔씩 하기는 한다.
아마도 그래서이리라, 본태 박물관 건물의 여러 구조물 가운데서 가장 탐나는 공간이던 명상실이다.
설계자 타다오가 의도하기로는 명상의 방에 들어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의 타래를 차분히 정리하고 나가길 바랐다지만.
뉘라서 감히 적요 깃든 그 방의 방석에 앉아 볼 엄두를 내랴.
미로같이 헷갈리고 드나듦 복잡한 비효율적인 동선으로 구성된, 기묘한 박물관 건물이라 다 돌자면 다리 묵직해지겠다.
건물은 인간과 자연의 대화 장소라고 설파한 안도 타다오는 독특하게도 독학으로 건축을 배운 사람이다.
권투선수 전력이 있는 그는 건축을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바 없이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로 풍경을 창조해 냈다.
건축의 본질이 인공과 자연, 개인과 사회, 현재와 과거 등 인간 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 간의 연결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한 그.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듯, 건축물도 언젠가는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물질이나 형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건축이다."란 그의 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본래의 모습'을 뜻하는 본태(本態)란 이름의 박물관은 안덕면 산록남로에 위치해 있다.
재벌가 박물관에 대한 선입관이 어이 깨지랴.
위치 좋은 대규모 부지에 박물관은 적절히 배치된 세
공간
과 다섯 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있다.
1관은 전통공예관으로 소반과 그릇, 여성 장신구, 침구, 의류, 목공예품 등 옛 생활 도구들 전시실이다.
전시 공간 한 면을 가득 채운 소반을 만나니 어릴 적 보아왔던 소박한 우리네 일상사라서 문득 반가운 순간이기도 했다.
2관은 현대미술관으로 살바도르 달리,
마티스,
피카소, 로버트 인디아나, 앤디 워홀
등의 자리다.
별도 전시실의 쿠사마 아요이 대표작 무한거울방과 호박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3관으로 이어진다.
‘피안으로 가는 길의 동반자’란 부제로 꼭두 인형과 전통 상례를 만나는 4 관도 후딱 지나칠 수가 없다.
불교미술의 정수를 모은 5관 역시
섣불리
방심하고 지나쳐선 안 될 것 같다.
본태 미술관 안주인이 가장 아낄 듯싶은 명상실에서 아쉬움으로 머뭇대다가 나와서 고가도로 같은 통로를 타고 들어간 백남준 전시실.
전면 통유리창 블라인드 사이로 산방산, 단산, 모슬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귀포에서 오름 셋에 바다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이만큼 훌륭한 전망 터 찾기도 어려울 거 같았다.
살아있는 금붕어가 꼬리 살랑거리는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 TV 수상기가 입구 쪽에서 반겼다.
아무래도 백남준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소양 부족한 지라 박물관 도슨트의 해설에 거의 의존했다.
비디오 아트,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아름답다거나 심미적으로 감정적 울림을 준다기보다 생소함 그 자체.
오래전 처음으로 접한 퍼포먼스, 파격적인 행위 예술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사실 1963년도에 TV를 분해하고 조작해 선보인 비디오 아트 작업은 낯섦 이전 첨단 제품 자체가 너무도 생경해 어리둥절하였고.
그는 당시 재벌에 준하는 부친 덕에 일찌감치 해외로 나와 선진학문을 섭렵, 일본과 독일을 거쳐 뉴욕에 입성한다.
전위 예술에 심취했던 그는 여러 장르의 예술을 혼합하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주목,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 공존을 고민했다.
동시에 여기에다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였기에 그의 미디어 아트는 전위적이면서도 심오하다.
시대를 앞서가는 창의적인 발상을 해온 그가 M.I.T 공대 교수와 뒤셀도르프 국립 미대 교수를 역임했다는 데는 저으기 놀랬다.
미국 현대미술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사랑과 희망
색감 산뜻한 프랑스 화가로 튜비스트인 페르랑 레제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입술
본태 박물관의 갤러리 2 현대관 작품은 추상과 팝아트로 채워졌다.
미국에서도 컨템퍼러리 아트 뮤지엄에 들어가면 뭐가 뭔지 숫제 까막눈이었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이 가로막힌 듯 난해하기 그지없는 작품들뿐이라서.
예술 분야 중에서도 시각예술인 미술은 눈으로 보고 대상의 아름다움에 감흥을 받는데 정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암만 봐도 무얼 표현했는지, 뭘 의미하는지, 도시 맥을 짚지 못해 아리송송, 어리둥절해지는 현대 추상미술 그리고 팝 아트.
추상 미술은 참된 실재 세계는 인간의 오성으로부터 해방된 직관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하였다는데.
대상의 재현, 공간, 서사 같은 기존의 모든 회화 전통을 거부한 탈 논리적이고 초이성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미술이라?
현대회화의 아버지라는 세잔을 거쳐 마티스의 야수파와 피카소의 입체파가 등장해 그의 맥을 이었다.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와 형상에 주목하여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세잔.
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형태에 집중한 피카소와 견고한 색채의 결합을 중시하는 마티스로 큐비즘은 각기 발전해 나갔다.
본태 박물관에서 만난 양대 산맥인 색채의 마티스와 형태의 피카소 그림은 이에 가장 충실한 표본 같았다.
정녕 그랬다.
세기마다, 분야별로, 동서양 어디에서건 아주 특출 난 인물이 배출되곤 하였다.
천재는 태어나는 것, 현대 추상 미술의 배경이 된 큐비즘을 이끈 Pablo Ruiz Picasso를 통해서도 재삼 느꼈듯이.
공예학교 교사인 부친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그림에 심취한, 재능 또한 탁월했던 그가 불과 14살에 그린 완벽한 유화를 보고 눈이 휘둥글, 동공 확대됐다.
그의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Salvador Dali, Patrick Hughes, Robert Indiana의 작품도 몇 점씩 이 박물관은 소장했다.
열 살 연상의 유부녀에 빠져 기어코 결혼에 이르는 등,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린 그림 이상으로 기행을 일삼아 온 괴짜로 널리 알려진 달리.
역원근법을 이용하여 보는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3D 입체 이미지를 통해 시각의 모순과 역설에 대해 탐구해 온 휴즈의 작품은 신선하기까지.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더불어 미국 팝아트를 선도한 거장 중 하나인, 단순하면서 강렬한 색채로 LOVE를 그린 로버트 인디애나.
사랑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현대 미술계를 사로잡은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곳은 필라델피아 존 F. 케네디 센터 앞이다.
포토존으로 유명한 자리라 두 팔로 하트를 만들어가며 사진을 찍을 당시만 해도 미술작품이리라고는 생각조차 아니했다.
일반 도시 조형물의 하나로 여겼던 LOVE가 팝아트의 거장 작품이었다는 걸 본태 박물관 도슨트의 설명으로 겨우 알게 된 무지라니.
참으로 세상은 넓디넓다.
알고 있는 건 고작 모래 알갱이 크기 정도일 뿐 거의 다 모르는 거 투성이었구나.
본태박물관 동선의 마무리는 5관의 루프탑과 조각공원이 담당한다.
산방산과 제주의 남녘 바다가 한눈에 조망되는 루프탑, 청명한 날씨라면 탁 트인 전망 한번 흉금 시원하게 해 주겠다.
여기서 기다리는 파란색의 ‘LOVE’는 이미 익숙해진 인디애나의 작품이다.
야외 정원으로 이어지는 발길.
헌종의
불꽃같은 사랑이 명멸한 낙선재를
둘러싼 담장을 연상시키는 높다란 한식
담장.
벽체에서 물이 냇물처럼 흘러내리는 담벼락 지나자 드넓은 후원으로 이어진다.
아기자기한 동심을 유혹하는 조각정원을 지나
수련잎 빡빡하게 뜬 호숫가로 나섰다.
호수 입구에서 독특한 조형물이 기다렸다.
씽씽 바람결 가르며 달리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자전거와 강렬한 색채로 춤추는 나비 떼가 시선 사로잡는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Euphoria’다.
세계적 건축 거장이 설계한 박물관, 고가의 소장품, 정원 조경을 위한 선대의 유물인 이끼 낀 석물 등등.
이는 동서양 어떤 부호들이라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호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여기서라고 설마 시샘으로 심사 불편할 리야.
저마다 타고난 운명대로 혹은 분복대로 한 세상 여행 와 거닐다가 떠나가는
인생사다
.
호우특보가 발령된 날씨 그나마 잠깐씩 푸른 얼굴도 보여줘 고맙던 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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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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