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어린 말들이 주는 힘
*소엽맥문동의 파란 열매껍질을 벗기면 하얀 알맹이가 나오잖아?
그걸 딱딱한 돌 위에 던지면 통통 튀는 거 알아?
-탱탱볼처럼?
-탱탱볼 이야기, 누군가에게 가르쳐주고 싶지 않아?
-가르쳐주고 싶어. 아빠한테. 그리고 친구들한테도.
-'가르쳐주고 싶은 사람'이 타로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좋은 거지.
- 마스다미리, <너의 곁에서> : 주말엔 숲으로, 두 번째 이야기 중에서
*백합과 여러해살이풀. 산지의 응달에서 자란다. 꽃은 5월에 피고 연한 자주색 또는 백색이다
좋은 것, 재미있고 기분 좋아지는 것,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알려줘야지!' 하는 친구가 있다면
반대로 "네가 좋아할 것 같아." 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오붓하게 만난 친구와 꼭 들르는 코스가 있다. 바로 문구점이다.
자주 들르는 곳 중 하나는 <롤드페이퍼>란 곳이다.
기가 막힌 색감과 디자인이 돌돌 말려있는 테이프들을 축! 뜯어 붙여보기도 하고,
마스킹테이프로 꾸민 소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사탕을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구경하면서 뜯은 테이프로 책갈피도 만들 수 있다.
친구는 신나게 책갈피를 만들면서 내가 잘 쓸 만한 테이프도 함께 골랐다.
예쁜 것을 고를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친구가 나라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영종도로 이사 온 탓에 친구들과 사는 곳이 끝과 끝. 열 뼘쯤 멀어졌다.
게다가 아이의 하원 시간까지 맞춰야 해서 약속을 잡기가 힘들어졌는데도
오랜 지기는 만남에 서두름이 없다.
자주 볼 순 없지만 연말이나 새봄, 하루만큼은 그동안에 우정 어린 생각들을 모아
몸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연필가게 <흑심>으로 골랐다.
수다를 떨다 보니 길 찾기 어플을 보는 대신 그냥 연남동을 한 바퀴 휘~ 돌고 있었다.
지나가는데 어느 빌라 앞 짙은 녹색의 입간판이 보였다. [연필]
여긴가 보다 하고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영 가게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올라가다 보니 '싱글라이프'라는 공간도 있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오피스텔 같은 곳이었다.
순간 나는 '싱글들이 모이는 핫플인가' 생각했는데
긴 부츠를 신고 온 친구는 '신발을 벗어야 하나' 당황했다고 한다.
그렇게 동상이몽과 의구심을 안고 올라가다 보니 옥상에 다다랐다.
우린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고 그만 빵! 웃음을 터뜨렸다.
가게를 못 찾은 것도 웃기지만 드라마에 나올 법한 허름한 청춘들의 옥상이었다.
소소한 운동기구도 보이고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잠시 앉아 서울 낮. 옥상뷰를 바라보았다.
"꼭 그때 같지 않아? 우리 노트북 들고 보따리 장사처럼 여기 저리 대본 회의하러 다닐 때."
나도 비슷한 시기를 떠올렸다.
함께 기획안을 준비하고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들던 시절.
[연필]이라는 간판하나만 보고 무작정 올라간 우리가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 테라스 지금 우리 상황인가. 좀 휑한데 그래도 생수도 있고 의자도 있어.
너랑 앉아서 노을 보니까 이런대로 또 좋네."
살짝 더워진 날씨 탓인지, 서로를 생각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너무 오래 걸어서인지
잠시 잘못 들어간 옥상에서 숨을 크게 쉬었다.
"우리 이렇게 나이 들지 말고 나이 들어가자.
할머니가 돼도 만나면 현실과 적당히 멀어져서 웃자."
그나저나 그 연필가게는 어디야? 분명히 올라가라는 표시가 있었는데...
내려오는 길에 가게 출입구를 찾았다.
딱히 살 건 없지만 구경하고 싶어 들어간 곳인데 보다 보니
생일을 앞둔 동네 친구가 생각났다.
친구에게 동네 친구 얘기를 하니, 자기가 받은 선물을 소개하며
이것저것 함께 골라주었다. 골라준 친구와는 우정 연필깍지(가죽으로 돼서 맘에 쏙 들었다)를.
생일인 친구에게는 책갈피 집게와 파스텔 연필 깎기, 이름을 각인한 파란 연필을 담았다.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며칠 후 동네 친구를 만나 (문구 3종세트) 선물을 건네었는데,
친구는 봄이라며 프리지어 한 묶음을 내게 안겨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계속 프리지어 향이 잔잔하게 흘렀다.
- 선물 고마워요. 남편이 선물로 준 노트북보다 더 마음에 들어요.
- 노트북 준 남편이 더 부러운데요. 그리 말해주어 고마워요.
톡톡톡. 메시지를 넣으며 웃음이 났다.
봄꽃 같은 친구들 덕분에
이제야 내 마음에도 봄이 들어왔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