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커플요금제가 불러온 비극
봄이 마지막 찬바람을 몰고 고양이처럼 달려온다.
따스한 볕을 슬쩍 보여주다가도
찬바람이 정신을 번쩍 나게 만든다.
추워서 나가기는 싫고 집에 있기도 싫은 그런 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 상황을 들었다.
쿠팡, 멜론, 넷플릭스를 공유하던 사이인데
넷플릭스는 갱신되는 달이 곧 돌아와서
이제야 해지하고 있다고.
"참 찌질하지?" 하는데, 마음이 쓸쓸하다.
요즘 연애는 그렇구나. 나의 마지막 공유 연애는
커플요금제였던 것 같은데...
요금제에 가입하면 서로 동의 하에 통화요금이 무제한이었던 때가 있었다.
드라마 <스물 하나, 스물다섯> 에피소드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요금제를 모르는 친구들이
꽤 돼서 새삼 내가 으른나이 축에 속하는구나 했다.
바람이 찬 봄날,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커플 요금제를 해지하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해지를 거부하면 커플 요금제는 취소할 수 없다고도 설명했다.
"상대방이 전화로 신청한 건가요?"
미련이 남은 나는 그가 정말 전화로 신청했는지 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전화를 하는 상담사분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싶다.
이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한번 더 이별을
확인시켜 주는 그가 야속했다.
그는 같은 층에서 제일 끝자리 야외촬영이 제일 많은 프로그램의 스텝이었다.
내 자리는 층에서 중간자리로 거의 동네 사랑방
수준이었다.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조연출, 서브작가, 소품 팀... 대부분이 또래가 많아서 마치 대학교 동아리처럼 활기차고 즐거웠었다.
교양프로그램을 하다가 처음 어린이프로그램으로
넘어왔을 땐 이런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어린이프로그램에 서브작가가 없었고 작가님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연출자와 연차 차이가 많이 나는 데다 회사에 상주하는 작가가 나뿐이어서 친해질 수밖에.
프로그램 특성상 인형, 장난감, 책, 음료수 같은 키즈용상품이 책상에 즐비했다.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남녀가 있다 보니 썸은 있기 마련. 가장 과묵하고 말없던 그가 내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힌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이야기를 들으니 허우대가 멀쩡하고 성실해 보여 은근히 옆을 지나가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더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기를 몇 달째. 소문은 점점 진짜처럼 커져갔는데 그는 내게 이름조차 제대로 묻질 않고 쳐다보면
귀가 빨개지기만 했다. 말은 걸지 않으면서 쳐다보고 있는 느낌. 눈에 띄게 자주 옆을 지나가는 것도 같고... 심증은 있는데 결정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자리에서 스텝들이 둘러앉아 얘기 나누는데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저기... 이 음료수 제가 드린 건데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쪽지하나 없이 떡하니 음료수 세트가 있으니 당연히 협찬상품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갑자기 와서
‘이게 내 선물이다!' 하니
다른 스텝들은 박수를 치며 오늘부터 1일인 거냐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놀람과 동시에 신기한 건
그 후로 또 아무런 얘기도 없는 것이다.
내가 먼저 관심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나를 보면 놀려대고 덕분에 그 사람을 자주 관찰하게 되니
호기심이 생겼다. 결국 답답해진 내가 행동해야 했다.
미적미적 퇴근하는 그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이거 맛있더라고요. 드세요~"
귀여운 동물모양의 초콜릿 두 알을 손에 쥐어 주자
그의 귀가 또 빨개졌다.
그 후로 어느 날, 퇴근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급하게 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요!"
뛰어 들어온 사람은 그였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어색한 기운만 감돌고...
1층에서 내리자, 옆에 있던 친한 작가가
자리를 비켜주자
"저... 이번 주 토요일에 뭐 하세요?"
"토요일에 스키장에 가요!"
"아...."
쭈뼛거리는 그를 보자 스키장 다녀와서 고단해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 내봤다.
"저 일요일은 약속 없는데! “
-걔있잖아. 모자를 벗은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날 모자 벗고 온다면 그건 찐이다!
일요일. 코디언니가 한 말이 신경 쓰여
약속한 장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를 찾았다.
예쁘게 드라이한 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