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세살 루아

어떤 순간

홍콩에서 보낸 마지막 여름

by 알미

한국의 가을을 뒤로하고 후텁지근한 홍콩의 여름으로 떠난 여행.

별다른 일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고단했고

뭐든 잘 먹는 아이는 생각보다 가리는 음식이 많아 별거 아닌 거에도 짜증을 냈고

몇 번의 시행착오와 하찮은 체력 탓에 우리는 조금 지쳐있었다.


빳빳한 흰색 시트의 침대에서 눈을 뜬 새 날이었다.

홍콩섬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디즈니랜드로 가는 전용 열차를 탔다.

미키마우스 모양의 창 너머로 야자수가 펼쳐지고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타임슬립하는 기분. 달뜬 기분으로 디즈니 성을 향했다.


32도 뜨거운 볕에 지친 우리는 겨울왕국으로 향했다.


겨울왕국 어트랙션에서 엘사와 황홀했던 시간을 보낸 후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진이 빠졌다. 지친 루아를 벤치에 앉히고

올라프 아이스크림을 쥐어줬다.

얼마 안돼서 주룩! 흘러내릴 것만 같은 찰나,

"퀵 퀵~ 크크크"

옆자리, 선글라스를 쓴 금발 단발머리의 중년 여성이 재밌는 소리를 내며 웃으신다.


가방에서 재빨리 물티슈를 꺼내 닦아주고,

(이미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묻으신 듯하여) 금발의 여인에게도 권해드리니

호호~ 웃으신다.


- 엄마의 가방에선 물건이 계속 나오네요.

- 맞아요. 마치 캥거루 같죠?


양산, 물통, 물티슈, 손수건, 간식, 선크림, 선글라스...

불룩하게 루아에게 필요한 것들을 잔뜩 넣은 내 크로스백.

(어쩐지 색상도 베이지라;;)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오! 난 리얼 캥거루를 알아요. 호주에서 왔거든요.”

- 전 한국인이에요.”

- 아! 한국~ 난 가봤어요. 서울이랑 태.. 대조온?”

- 대전? 마이 홈타운!


약간의 스몰토크 중에 한 말이 있다.


"나는 이 순간을 좋아해요. 아이스크림이 쥬륵~ 떨어지는.

어른이고 아이고 상관없죠. 어딜 가도 모두 같아요. 난 이때 사람들을 보는 게 재밌어요."


러블리 모먼트! 그거 하나로 여행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일상에서 조금은 친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발의 중년여성과 더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사는 것에 대해.

영어실력만 좋았어도 더 나누었을 것을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를 즈음,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보며 끝인사를 했다.




휴가철도 아닌데 5박 6일. 조금 긴 여행을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족의 또 다른 변화 때문이다.

여러 복잡한 이유로 당분간은 주말 부부를 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3주 차가 되어간다.

첫 주는 아이와 새벽에 자주 깼다.

'나는 언제쯤 안정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매몰되어 걱정하는 사람의 전화와 방문을 차단했다.

두 번의 주말을 보내고 아이를 온전히 양육해야 하는 내가 조금 더 강해져야겠다고 느낀다.

남편도 한걸음 용기를 냈으니 나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더 용감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결혼은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계속 들어가지만,

매일 안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 맡길 수 있는 사람과

더 이상 얕은 계산 없이 팀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둡고 어색했던 소개팅의 나날을 지나왔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안도였다.

지혜도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고 우스운 잠깐 생각했다.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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