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자리
안타까운 소식도 있지만 태풍이 온 후 하늘은 그야말로 청명 그 자체다 쨍한 볕과 가을바람.
다시 집에 가서 일을 하거나 밀린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날씨다.
아무 일도 없는데 들뜨는 날씨라...
매우 중요한 이벤트다.
그간의 고단한 시간들이나 나를 힘들게 한 뾰족한 말 따윈 가을볕에 소독하게 된다.
평소 같으면 살찔까 고민하던 달달한 커피를 시켜놓고 창가에 앉았다. 얼마만의 여유야 정말.
지겹다 진짜 지친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뚜렷하게 들렸다. 그가 나에게 말한 그 한마디로 나는 혼자 방에서 울었다 아이가 안아주며 같이 울어줬다
"엄마 왜 그래? (눈을 가리키며) 이거 물이야?"
"응 엄마가 아빠한테 많이 섭섭해. 엄마 마음이
너무 답답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섭섭 답답.
그동안 단어로 선택되지 못하고 맴돌다가 눈물에 휩쓸려 터져 나왔다. 아 시원하다.
서운했다 그동안. 그런데 그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냥 말하는 내가 지치고
지겨운 건 똑같았나 보다.
이렇게 울컥하기 전에 따뜻한 말 한마디
"힘들지 내가 도와줄게"
"좀 자고 해 내가 깨워줄게"
"상처 좀 봐 너무 심하잖아 흉 지면 속상한데..."
그리고
"생일 축하해. 고마워"
이 말만 해줬으면 이렇게 울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게 많이 어려운가.
말이 없던 남편도 지지 않는다.
나는 노는 게 아니다. 나도 아픈데 병원도 못 간다.
인상을 구기고 퇴근하는 그의 눈치를 보고
"힘들어 어떡해. 토요일 아침이라도 병원 다녀와"
라고 말하던 나는 없나 보다. 그래 그랬구나...
"다정한 사람이요. 대화가 잘 되고요
마른 여자가 이상형이면 저는 힘들어요."
소개팅에서 이상형을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종알종알 내가 있었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매일매일 '일'이 있죠?
시트콤을 써보는 건 어때요?"
작은 눈을 반짝이며 호응해줬다. 그게 귀여워 또또 재밌는 일상을 나눴다. 이 사람이라면 말이 없어도 하루 끝에 식탁에서 도란도란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했다.
다만 화가 나면 입꾹에다 읽씹, 전화까지 안 받는
회피형이라 고민이 됐었다. 그래도 선한 사람이니까 내가 더 말해주고 이해해주면 되겠지 했다.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쉽게 잘 전달하려면 마음을 여러 번 기울여 정리해야 한다. 관계가 지속될수록 그 에너지는 미약해져 나 또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럼 사랑은 어디 있어?
결혼생활이 궁금한 친한 동생이 물었다.
음... 아빠를 꼭 닮아 장난스러운 얼굴에
나와 아이를 위해 기꺼이 바닥에서 자는 태연함에
주말에 정성껏 구운 고기와 스파게티에
추운 날 자기 전 전기장판을 예열해 놓는
마음에 있았나 봐.
그도 똑같이 아프고 지쳤겠다.
엄마 세 살, 결혼 5년 차 과도기는 서운함과 권태
미움과 짠함이 엉켜있지만 태풍 후에 오는
황홀한 가을 하늘처럼 더 깊어지고 있는 걸 거다.
라고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