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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미 Jul 23. 2022

"나 기억나?"

갑자기 걸려온 전화& 유미의 세포들 1,2 정주행을 마치며

 웹툰을 보다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쿠키까지 사가며 열중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동건 작가님의 '유미의 세포들'이다.

유미 안에 세포들이 얼마나 합심하며 유미를 지켜내는지 귀여운 캐릭터와 연애 이야기가 재미있는 작품이다. 사람마다 그 사람의 성향을 대표하는 프라임 세포가 있는데, 사랑 세포가 프라임 세포인(사랑이 우선순위인, 세포들 중 힘이 제일 센) 유미가 정착한 남자는 누가 될지 설레기도 하고 오해하면 화가 나고, 이별을 직감할 때면 같이 아파하며 봤더랬다. 


티빙에서 이 작품을 드라마하고 여러 짧은 영상들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새로운 서비스에 가입하긴 아깝고 누구 없나~ 하는 찰나 친한 언니의 아이디를 빌려 틈틈이 정주행을 시작했다. 바로 어제 시즌 2의 마지막 방송이 끝났다. 서른 둘로 시작한 유미의 일상은 몇 번의 이별과 진로 변경 후 드디어 균형을 찾는구나 싶을 때 세 번째 남자와의 인연을  암시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드라마가 종영됐다.  이제 현실에서는 달달한 사랑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원래 로맨스를 좋아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연애에서 지난 나의 리즈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내 세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달라졌을까? 그 사람은 뭐 하고 있을까? 잠깐씩 추억에 젖곤 했다. 


그날도 가장 싫어하는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유미의 세포들'을 보며 저녁 설거지 중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고무장갑을 벗을까 말까... 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알미야 나야. 나 기억나?

익숙한 듯 다정한 남자 목소리에 놀라 (혹시 무서운 전화인가 싶어 경계심을 잔뜩 높이고)

"누구시죠? 저를 아세요?"


웃으면서 전화를 건 사람은 학부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어울리기도 한 친구. 내 성과 비슷해서(가나다 순 학번) 행사가 있어 모일 때 가까이에 있었고, 조별 수업도 가끔 했던 것 같다. 

"세상에 너였어?"


지난주부터 교양 프로그램의 자막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재택을 할 수 있고 아이 등원 후 집중해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시작해보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고 떨어지지 않아서 울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왜 쓰는지 수긍이 갈 정도로 분량도 많았다. 간신히 한편을 넘기고 난 다음날에 전화가 온 것이다. 대본에 그의 이름이 PD로 쓰여있었는데 졸업 이후 방송판에서 본 적이 없어 잊고 있었다.  


여기까지 이렇게 쓰고 나니 그 친구가 썩 멋져 보이겠지만 남사친으로서도 관심이 없던 그였다. 

"네가 날 기억 못 하면 안 되지. 내가 너 오디션 볼 때도 같이 가 줬잖아."

"오디션이라니 내가 무슨?"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우리 때는(라테는 말이야) 길거리 캐스팅이 유행이었다. 매니지먼트 업계에서는 근무실적처럼 성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명동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수박장사 느낌(수박장사를 비하하는 건 아니고)의 패션이었다. 허리 쌕을 하고 썬캡을 옆으로 쓴 패션. 나는 키도 작고 팔다리가 짧으며 동그란 체형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는 훨씬 날씬하겠지만) 통통한 편이었고 그나마 눈이 큰 것이 장점이었다.  어쩌다가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는데 받은 명함을 들고 그 친구와 에이전시로 오디션을 갔다는 것이다. 세상에 왜 그 친구였을까?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까만 얼굴에 힙합 청바지를 입은 키 크고 헐렁한 아이.

"야~ 뭐 그런 걸 기억해. 이게 정말 무슨 일이야 진짜 웃기다."

잠깐 수다를 떨고 서로의 근황을 물으니 내가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이력서를 보고 전화했다는 거다.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사의 대표가 친구였다. 

"뭔가 열심히 살았구나 대표도 되고. 나는 애기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너무 고맙게 후배가 소개해줬어. 연락 준 작가님도 정말 좋으시더라. 너 인복이 많나 봐."

들뜬 목소리로 한껏 축하해주고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오늘 신기한 일을 남편에게 말해줘야지. 남편은 매일 회사에 가지만 집에 있는 나보다 더 에피소드가 없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를 다채롭게 보낸다고 신기해하는 사람이다. 

이 얘기를 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만나. 그런 네가 얼마나 변했는지."

무시하는 말투다. 이건 예상 못했다. 언제 한번 보자고 하는 친구에게 '그래!' 하고 말했지만  나는 그 친구를 만날 자신이 없다. 그래도 난 아기를 돌보고 짬짬이 일하는 내가 좀 기특해지던 찰나였다. 남편의 말에 속이 상했다. 나도 모르게 

"지금 한 말 잘 기억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후회하지 말아요."

표정이 굳어져 선전 포고를 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와 내가 불륜을 하겠다는 의지? 는 아니지만 나의 과거를 궁금해하고 와~ 해주면 안 되는 걸까. 그러기 싫었다면 꼭 그렇게 외모 비하를 했어야 했을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친구가 나를 좋아해 고백을 준비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 친구를 좋아한 다른 여자아이가 나에게 메일을 쓴 적도 있다.(나랑도 친구로 지내면서 그 아이와 사귀고 싶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그 친구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고백한 적도 없었고 나는 다른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얘기까지 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관심 없어 흥!" 질투하는 척이라도 해주거나 

"머야~ 그래서 좋았어?" 질투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어디 덧나나. 5년 동안 착실히 쌓아온 살만큼 남편이 미워졌다.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마음이 분주해진 만큼 틈나는 대로 일하고 치우고 돌봤다. 그런 모습에 남편도 적극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도왔다. 힘들어서 어떡하냐는 말과 다르게 은근한 미소도 보였다. 그 미소를 보고 많이 부담되었나 보다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이겨내 보겠다 다짐했다. 


우리가 서로 배려하고 애쓰는 만큼 조금 더 상냥하게 말로 대해줄 순 없을까. 외모가 흐트러져도 사랑해줄 수 없을까. 


유미의 세포들 이야기로 돌아가서... 유미의 첫 마음을 나눈 상대, 공돌이 '구웅'은 유미와 헤어진 것을 가장 후회하며 작가가 된 유미의 글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전 남자 친구', '회사 대표' 모드도 잊고 열심히! 열렬히! 선플을 단다. 그 모습이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 한 명의 여자를 어느 상황에서도 응원하고 사랑해주는  모습은 가장 귀엽고 내 마음을 흔든다.  


낯선 전화 덕분에 그때 받았던 따스함이 생각난다. 언젠가 결혼식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는데 

지금에야 기억났다. 주차장에서 걸어가는데 누가 부르길래 봤더니

"나야. 난 멀리 있어도 너 알아보지! 여전히 이쁘네~" 하던 다정한 말을 해 준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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