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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미 Oct 25. 2023

그저 기다릴 수밖에

삶의 변수에 대하여(feat. 전세살이의 서러움)

 문득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유명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을 읽었던 스물두 살에는 미친 사랑에 중독된 여자의 마음인 줄 알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갈망할 수 있을까 그저 놀라움에 그쳤다. 십 년의 세월을 두 바퀴 돌고 나니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이렇게 돌아버릴 정도로 미치는 감정인지 실감하게 된다. 남자 때문에? 아니, 사람이 아니라 집! 전세 때문이다.


 아침에 걸려온 전화 한 통. 집주인 대행이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이사 날짜가 한 달 앞으로 온 시점에서 전화한 이유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집주인과 우리 사이의 사업자인 대리인은 사업의 험난함과 시기에 대한 한탄 등등으로 서두가 길었다. 결론은 정확한 날짜에 돈을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조율하자는 내용이었고, 우리는 당장 우리가 이사할 집의 전세금을 상환해줘야 하는 상황의 다급함을 얘기했다.


약자를 보호해 줄 수 없는 법, 있는 자들의 욕심, 그 와중에 이득을 보는 사람, 손해가 겹치는 사람.

누가 제일 위험에 처해있는가? 약자배틀에 출전한 선수처럼 전의를 다진다. 우리의 다급함과 불쌍한 상황을 피력하다가 이 모든 게 무의미해진다. 결국 가진 자인 집주인이 끌어안고 있는 재산을 놓으면 단박에 해결되는 일이다. 주고 싶어도 '없어서 못줘'가 아니라 '이것까진 놓고 싶지 않아!'이지 않은가?


상쾌한 가을 아침나절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집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일이다. 다녀간 자리를 정리하고 내었던 찻잔을 씻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단호하게 얘기해야는데 내가 처음 한 말은

"차 한 잔 드실래요?" 라니.. 나도 참.


냉장고 문을 열어 어설프게 남은 밑반찬을 꺼냈다. 뜨끈한 밥을 퍼서 큰 양푼에 넣고 반찬을 가위로 난도질한다. 저녁거리로 재어둔 불고기를 조금 소분해 굽고 고추장을 덜어냈다. 다 섞일 때까지 팍팍 비볐다. 참기름도 한 방울 넣고 남편과 나란히 앉았다. 말없이 끝까지 비빔밥을 다 먹었다. 아무래도 어른 수업을 톡톡히 받는 중인 요즘이다. 심각한 상황에도 툭 털고 일어나 밥을 먹는 것. 그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되라고 말이다.



슬픈 일에도 웃을 수 있고 기쁜 일에도 울 수 있는 것.

기꺼이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것. 그럴 수도 있지 헤아려보는 것.

심각하다가도 툭툭 털고 일어나 밥을 먹는 것. 내가 지어 내가 먹는 것. 나눠주는 것.

힘차게 껴안아주는 것. 씩씩한 것. 내가 가진 기질은 모두 우리집 여자들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 고수리,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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