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고해성사가
필요한 날.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행복이란 단어를
잘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
왜냐하면 행복이란 단어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 내가 느끼는 행복지점이 그대가 느끼는 행복지점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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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말했다.
행복과 관련해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을 행복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사람마다 각자의 가치관이 다르고, 어떠한 상태가 행복한 상태인지 보는 것이 다르므로.
행복을 보편화한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어려운 숙제였다.
02.
20대의 나.
심리학과 철학 분야를 좋아했고..
꽤 깊게 파고 들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두 분야를 좋아했다기보다는..
나의 근원적이고 고질적인 어떤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책을 펼쳐가며 공부했을지도 모른다.
대학교를 입학하며 겉으론 평온한 척 다니고 있어도. 곧잘 나에게서 오는 우울감과 염세주의 기질은 쉬이 내 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착한 척, 친절한 척, 상냥한 척하지만...
뒤로 돌아서면 헛헛함과 동시에 허무함이 잦아들다.. 이내 냉소적이고 싸늘한 나 자신으로 변해갔던.. 얼음처럼 차가운 어린 날의 내가 있었다.
대학교 졸업 시즌이 점점 다가올수록 더해졌다.
그때 나는 "행복"이란 단어에 집착했다.
왜냐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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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대학교 3학년 2학기 이후, 나의 내면적 고통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과 하나 둘 인연을 끊고.. 1년 반 넘게 셀프 고립의 시간을 가졌다.
대학교 4학년 시기에는 1달 넘게 학교 수업을 결석하며 오로지 집안에만 처박혀.. 내 삶에 행복이 없으니 온종일 무기력하게 있었다.
하루는 정처 없이 버스를 탄 채 한강 남쪽 끝과 끝은 타고 다니기도 했다.
나에게 행복이 없다 생각하니..
행복을 찾기 위해 아침부터 서점에 갔다.
심리학 책 코너를 서성이며 나의 마음을 달래려.. 남의 글을 수 없이 읽고 또 읽다 적었다.
적어온 글은 집에 와서 다시 보고 잠들다시피를 반복했다.
10년, 20년 내내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사유와 사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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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그러던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에게 행복이 없다 생각하니, 진짜 눈앞에 행복이 있어도 못 느꼈던 것.
행복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
결국 내가 뱉어냈던 나의 언어와 말이 내 삶의 행복의 유무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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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가만히 여기 내 행복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그 자체가 이미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저절로 행복한 삶과 행복한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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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나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or 행복하세요"란 말을 하지않는다.
타인에게 ..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은.
그 사람에게 행복이 없어 보이거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뱉어내는 말이라 생각해서..
행복한 순간은 찾을 필요도 없었고,
집착 할 필요도 없었다.
행복에 집착하는 순간,
행복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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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시간이 지나...그리고 지금 글을쓰며 동시에 깨달은 것
행복은 빈도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었다.
행복의 빈도와 강도를 느끼려고 하는 것도..
내 안에 행복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자주 느끼고 찾으려고 하는 것이라서.
그저 지금 내 안에 행복이 있다고 느껴지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살다보면.. 저절로 행복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고, 그 깨달음의 앎이 오기까지..
나는 2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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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나는 감사하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는 언제든 나누어주어도 다음날 또 새롭게 생성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감정은 나누어 주고 또 나누어 주어도.. 다음날 새로운 마시멜로우처럼 또 나타나기에.
감사와 사랑에 대한
에너지 총량법칙은
무한임을 느끼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