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논문 쓸 때가 갑자기 오버랩된다. 2층 거실 구석에 컴퓨터가 있던 책상에서 밤새워 워드를 치다가 소파에서 잠들던 때. 식구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깨울 수 없어 그대로 놔뒀던 그때의 거실이 눈앞에 아련하게 들어온다.
이 낭독회 준비가 그랬던 거 같다. 공연 앞둔 2주간은 꼼짝도 못 하고, 새벽 2, 3시까지 전체 콘티 짜고, 진행 멘트 만들고, 영상 만들고. 어떤 날은 영상을 다 만들었는데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졸음을 못 이겨 깜빡하고 고개를 떨궜다. 도대체가 파일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만들었다ㅜㅜ 다행히 첫 번째보다 두 번째 만든 영상이 훨씬 나았지만. 이렇게 어떤 이벤트를 진행할 때에는 늘 삽질의 시간이 매번 생겼다.
올해 나의 정체성을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으로 잡았다.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이 무대에 서서 그들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을 세우는 리더로 말이다. 그리고, 그 결심은 너무나 쉽게 실행에 옮겨졌다. 하지만 엄청난 일의 분량과 그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준비 기간 내내 나를 짓눌렀었다. 기획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때는 이미 빼박이었다.
그래, 즐겁게 하기는 했다. 넘치는 아이디어로 내가 생각한 프로그램들이 서서히 생명력을 찾으며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창작의 불꽃은 훨씬 더 이글이글 타 올랐다. 2월부터 각 파트별 사람들과 줌에서 만나 연습하고, 글 피드백하고, 그러면서 공연 1주일 남긴 일요일에 전체 리허설도 했다. 물론 줌에서. 그때는 진행하느라 못 느꼈는데 그다음 날 생각해 보니 그 바쁜 사람들이 나까지 13명인데 리허설에 전원 참석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작 3분 낭독인데 긴 두 시간 이상을 화면을 켠 상태로 함께 해줬다. 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에 토 달지 않고 기꺼이 다들 참석한 것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워 우리 낭독회에 더욱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수강생들은 고맙게도 자신의 글을 스스로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러면서 그들의 글에도 성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점자도서관에 보낼 책 녹음도, 매일 올리는 녹음도, 오디오북에 올릴 글도 쓰면서 연습도 해야 했다. 기본 집안일에 학생들 피아노 레슨에 모든 것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데 그 위에 낭독회 준비라는 어마어마한 컨테이너 박스가 얹혀진 것 같았다. 그걸 마지막까지 받쳐야 한다는 생각에, 공연 당일까지 팔이 부들부들거릴 정도로 이 악물고 달렸었다.
드디어 공연 당일! 리허설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회 대본이 하나도 안 외워질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가.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을 정도였다. 덜덜거리며 떠는 사람, 조명은 낯설고, 당일에서야 ppt를 낸 사람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나머지 작업을 했던 일, 마이크 스탠딩을 쓴다 안 쓴다, 조명이 너무 세다 등등. 문제는 내가 제일 큰 문제.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하는 꼴이 영 보기 안 좋을 것 같아서 사회 대본을 다 외웠건만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한숨이 땅이 꺼져라 저절로 나왔다. 그러면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사람들은 들어오고...
으악! 3시!! 공연 시작!!! '오늘의 날씨'라는 오프닝 낭독과 내글방낭(내 글로 방송하고 낭독하는 나의 줌강의) 영상으로 소개가 끝난 후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내글방낭의 신정민입니다~"로 시작한 나의 멘트는 막힘 없이 술술 나왔다. 거기다 애드립까지. 마지막 멘트에서는 '남극점에서의 극한 상황을 극복한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한 김영미 대장의 대답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녹음해 가서 들은 것이었다'라는 기사를 전했다. 목소리는 당시의 분위기, 그 사람들, 그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한 내용이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청중들의 삶 속에서 어느 날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연진, 도와준 스탭 모두 멋졌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가 이런 짓을 잘한다. 그리고, 잘 해내기도 한다. 이번에는 공연 끝나고 사람들과 즐겁게 뒤풀이를 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항상 피아노 연주하고 나면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었는데 이 기획과 낭독회는 조금 내 체질인 듯 이상하게 떨리지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에너지가 컸기에 그럴 수 있었겠지. 그들에게 감사하고, 함께 해서 행복했다. 다시는 안 하겠다 했지만 다음엔 어떻게 다르게 할까를 고민하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못 말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