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반 4학년 친구들과 생활문을 써 보았다. 원래는 그림책을 읽고 아파트 밖에 나가 개망초며 까마중 같은 여러 풀꽃들을 관찰해 보려 했는데 비가 온다는 예고에 급하게 수업안을 변경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 사실 그건 구차한 변명이긴 했다. 예보와 다르게 날은 꽤 화창했고, 오히려 약간 흐려 밖에 나가 활동하기 딱 좋은 여름 낮이긴 했다. 그렇지만 나가기 싫었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문 밖에 나서기만 해도 산책 나간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닐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에 가능하면 역동적인 수업을 하고 싶지만 밖에 나가 수업을 하면 동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어쩐지 쑥스럽고 부끄럽다는, 이중적인 마음으로 갈팡질팡하던 내게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좋은 핑곗거리가 됐다.
어찌 되었건 나는 답답하지만 편안한 내 집에서 수업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고, 감정 그래프를 그리고 글감을 찾은 뒤 또래 친구들의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으로 대강의 계획을 짰다. 내가 준비한 수업 계획은 무미건조했지만 극 E인 몇몇 어린이들의 활약(?)으로 나름 즐겁게 아이들은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사실 내가 큰 준비를 하지 않아도 이곳에 와서 마음 놓고 떠들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든 시간을 활기차게 보낸다. 그럴 때 내 마음도 편하고 유쾌해진다. 공부 스트레스에 찌든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 어떻게든 감정을 배출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이 수업의 목적은 일부 이룬 것이 아닌가 자위한다.
드디어 이 수업의 하이라이트인 글쓰기 시간. 저마다 자신이 고른 글감을 이야기하는데 땡돌이의 글감이 영 거슬린다. 제목부터가 ‘그냥’이다. ‘그냥’이라는 글감으로 도대체 어떤 글을 쓰겠다는 것인지 감이 안 잡힌다. 감정 그래프를 보니 ‘형과 싸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힘들다’는 등 얘깃거리가 여러 개 보인다.
“아, 땡돌아, 쓸 거리가 많이 있는 글감을 골라야 글쓰기 쉽지 않을까?”
애써 돌려 말하며 다른 글감을 고르길 권했지만 땡돌이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땡돌이는 이제 나와 수업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된 친구다. 4학년쯤 되면 열 줄 정도를 밥 먹듯 쉽게 쓰지만 땡돌이는 첫 한, 두 줄을 쓰기도 힘겨워했다. 좀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다. 그것이 나와의 합이 되든, 글쓰기가 되든.
그런데, 내가 그리 많은 것을 내어주지 않았음에도 땡돌이가 나에게 말을 붙이는 횟수가 늘었고, 자신의 일상사를 툭툭 던지듯 털어놓았다. “태권도 승품 심사 봐야 하는데 연습을 하루에 두 시간씩 해서 힘들어요.” “나는 노예예요. 우리 형이 자기가 보고 싶다고 이 책 빌려 오래요.” 이 친구가 나를 편하게 느끼고 있구나. 마음을 조금씩 내어주고 있구나 싶어 고마웠다.
마침내 땡돌이가 완성된 글을 낭독했다. 제목 ‘그냥’.
그냥
나는 그냥 기분이 안 좋았다. 이유는 없다.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나도 이유는 몰읍니다. 절대 물어보지 말아주세요. 진짜 몰라요.
경고했습니다. 재발 물어보지 마세요. 이유를 알려주겠습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그냥 대충 살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너무 지긋지긋합니다. 재발 공부가 없어지면 좋았을탠대요.
재발 공부야 살아져야 합니다. 공부는 물러가라.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입니다.
아, 땡돌아....
마음이 찡했다. 비록 맞춤법이 엉망이어도, 예사말과 높임말이 섞여 있어도, 내가 겪은 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쓴 글 중 가장 길었고, 진솔했다. 아직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대충 살고 싶다’니. 자신의 힘듦을 절절히 표현한 글에 가슴이 찔리듯 아팠다. ‘그냥’은 땡돌이에게 최고의 글감이었다.